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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란 Jul 20. 2020

서른 살, 대학원에 가도 될까요

비전공자, 디자인 대학원에 합격하다

       

지난달, 두 곳의 면접 결과를 기다렸다. 하나는 대학원, 다른 하나는 경력을 살린 회사의 면접. 둘 다 같은 날 발표 예정이어서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둘 다 붙으면 어떡하지? 이상하게도 둘 다 한꺼번에 떨어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퇴사 후 1년 남짓 놀면서 수입은 줄고 자의식과 뱃살만 늘어난 모양이다. 대학원 서류 접수를 할 때만 해도 대학원에 정말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회사 면접 전 바닥난 파운데이션으로 겨우 메이크업을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그냥 대학원 떨어지고 회사 면접에 합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느낌 상 대학원보다 회사 면접을 더 잘 본 것 같아 취업으로 마음이 꽤 기울어져 있었다. 대학원 진학이 주 목표였고, 혹시나 떨어질까 봐 보험으로 취업 면접을 봤던 것이었는데 주객이 전도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원래 설정했던 대학원의 방향으로 다시 잡아준 건 역시나 J였다.


둘 다 붙으면 어디 가야 하지? 내심 취업으로 기울어져 있던 내게 J는 그걸 고민이라고 하고 있냐, 당연히 대학원이지, 단호하게 말했다. 돈을 벌고 사고 싶은 걸 사며 소확행을 누릴 것인가, 쉽게 대체될 수 없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것인가. J의 단호함에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다 떨어진 파운데이션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취업하고 싶어 졌다.




비전공자, 디자인 대학원에 합격하다


H대 발표 났어요.


대학원 준비 카페에서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다가 내가 지원한 학교가 하루 일찍 발표가 났다는 게시글을 발견하고, 늦은 저녁 홀로 거실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합격자 조회를 했다. 차마 결과를 바로 볼 자신이 없어 눈을 감고 클릭을 하고, 잠시 뜸을 들인 후 슬며시 눈을 살짝 떴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보이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그 바람에 J도 놀라 방에서 뛰쳐나왔다.


나 합격이야.


결혼식 딱 한 달을 앞두고 퇴사를 통보받던 날, 그래서 결혼식 전날 마지막 출근했던 것, J의 추천으로 디자인 수업을 수강하고 복습하며 과제를 하던 날, 포트폴리오를 만들던 날, 백수로 꼬박 1년을 보내며 하염없이 인생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잠 못 들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J는 그런 나를 안아주며 축하해, 수고했어 라며 한참을 토닥여주었다.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기 시작했던 대학생 시절로부터 10년 뒤, 서른이 되어서야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서른에 대학원에 가는 이유


몇 년 전, 이직을 위해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교직원 면접을 보던 날,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하고 쟁쟁한 경쟁자들에 기가 죽...지는 않았고, 당연히 떨어질 줄 알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며 면접에 응했었다. 그래서 그 당시 팀장님이 하셨던 앞으로의 계획/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학원에 가서 직장과 병행하겠노라 당차게 대답했었고, 어이없게도 합격을 했었다.


그 정도로 대학원 진학은 내게 이루지 못한 계획, 꿈, 미련 이런 것이었다. 대학원에 가서 무엇을 공부할지 정하지도 못했으면서 면접장에서 그런 대답을 했으니 말이다. 당찬 나의 대답과는 달리, 입사 후 결국 일에 치여 대학원에 지원조차 하지 못했고, 떠밀리듯 퇴사를 했다.


참여했던 사업도 재계약에 성공했고, 지난 나의 성과도 좋았지만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응, 2년 후 정규직 안돼. 중규직(무기계약직)도 안돼.' 라며 나를 밀어낸 대학을 보고, 나는 그저 쉽게 대체 가능한 사람이었구나를 새삼 깨달았다. 새로 생긴 부서의 원년 멤버로 다 같이 맨땅에 헤딩하고, 그러했던 순간들을 노하우로 축적하고, 다른 모두가 퇴사해서 일을 혼자 다 떠맡게 되어도 자리를 지키고, 오히려 그 덕에 업무의 숙련도도 높았지만, 그 모든 것이 새로운 계약직을 뽑아 갈아 끼우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대학의 태도에 허탈함을 느꼈다. 또한 지금까지 직장생활 중 가장 나이스 한 상사를 만났지만 본부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어 무력하게 내게 퇴사를 통보하던 팀장님의 모습과, 그와 더불어 내가 퇴사해도 또 똑같은 하루를 살아갈 너무나도 지-극한 그의 평범함에 울컥한 하루도 있었다.


그 후 다시는 쉽게 대체될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통장잔고는 얼마 못 가 마이너스가 되었다가, 잠깐 플러스가 되더니 제로(0)에 수렴하길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 몇년 전의 나였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어떻게든 다시 돈 벌러 갈 생각을 했을 텐데. 그런 면에서 J는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우리가 지금 당장 돈이 없지, 나중에도 돈이 없을까? 대학원은 투자야, 자기가 얼마나 잘하는데. 석사도 하고 박사도 하고 교수해서 총장까지 다 해.


이런 말들로 J는 자꾸만 나를 꿈꾸게 했다. J의 응원과 악에 바친 다짐 덕분인지, 나이 서른에 비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디자인 대학원에 합격했다.




인생에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며 크나큰 꿈에 부풀어 있진 않다. 교직원으로서 대학의 민낯을 너무도 가까이에서 지켜봤기 때문인지, 교수-학생-직원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대학원 생활에 대해서도 기대가 별로 되지 않는다. 대학원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서도 걱정만 앞서고, 이 길이 맞을까? 여전히 의심스럽다. 어디 용한 곳에 점이라도 보러 가고 싶을 정도다.


합격을 확인한 후 양가 부모님께 소식을 알리고, 나를 가르쳤던 디자인 선생님께도 소식을 알린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퇴사했던 직장에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었다. 비록 무력하게 내게 퇴사를 통보했지만, 같이 일했던 상사와 동료들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있을 마음의 짐이 있다면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방문 약속을 잡고, 1년 하고도 몇 개월 만에 다시 출근길 운전대를 잡았다. 광화문을 지나 익숙하고 빠른 길로 향하는데 자꾸만 내비게이션이 높낮이 없는 기계음으로 딴지를 걸었다.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인생에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지금 네가 앞으로 가려는 길에 확신을 줄 수는 없어,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네가 가는 이 길은 아니야. 잠시나마 다시 비슷한 업계로 돌아가 일하려고 했던 내게 하는 말 같아 운전 중에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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