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초인‘종’은 울리나.
누군가에게는 별일도 아니고 일상적인 일이,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버킷리스트로 적을 만큼 특별하고 간절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버킷리스트가 뭐냐고 묻는다면,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에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셔보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곁들어 책 한 권 읽을 수 있는 느긋함 한 스푼을 추가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말이다.
지난 10년간의 과거 나에게 묻는다.
차오름 씨, 추석과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계획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분명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을 테다.
추석과 설날이라... 명절이네요. 그런데 그게 뭐죠? 뭐가 있나요?
뭘... 해야 하나요? 일단 계속 일하는데요? 쉬어야 뭐라도 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일이었다. 그게 보편적인 삶인 줄만 알고 살았다. 신규 간호사 때는 당연하게도 선배 간호사와 기혼자 위주로 오프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나의 신청 여부와는 별개로 명절에 쉰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연차가 생긴 시니어가 되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선배와 상사의 눈치와 압박에 시달렸다.
“네가 없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냐, 그러지 말고 네가 좀 나와줘. 나이도 어린 쟤네가 뭘 알겠어, 그래도 일 잘하는 너 같은 애 하나는 명절에 나와줘야지. 우리는 결혼해서 애가 있잖아. 시댁이 얼마나 피곤한 줄 아니? 전 부치고 차례상 차리다 보면 연휴가 아니라 차라리 일 나오는 게 더 편하다니까. 나는 차라리 명절에 일하고 싶어. 일 하는 게 속이 편해. 친정 챙기랴, 시댁 챙기랴, 애들이랑 애 아빠 챙기다 보면 내 시간은커녕 벌써부터 진 빠진다 에휴.”
칭찬인지 입에 발린 꼬드김과 같은 말인지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말, 묘하게 구슬리면서 타인을 본인의 생각대로 조종하는 듯한 말. 요즘은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던데 아무튼 과거 직장생활에서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은근한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나는 아직 미혼이니 명절엔 무조건 기혼자인 사람을 당연히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 챙길 남편이나 아이가 없으니 혼자인 내가 추석에도 설날에도 당직 근무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 이제 막 입사한 어린 신규간호사들이 얼마나 부모님과 가족이 보고 싶겠어, 그러니 그냥 내가 하는 게 속편하다는 생각.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들에 사로잡혀서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이라면 그래도 내가 하는 게 낫지, 이게 뭐라고 그냥 내가 다 하자는 묘한 영웅심리 같은 것도 있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근무표를 조정하고 바꿔주면 고마워하던 그들은 어느샌가 당연하게 명절에 쉬는 사람, 일하는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언제까지고 그래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신규 간호사를 벗어난 지가 언제인데 명절에 쉰다는 건, 사회생활 몇 년 차가 지나도 나에게는 꿈도 못 꿀 그림의 떡이었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해가 떠 있을 때 퇴근이라도 하면 감사한 하루였다. 남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출근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낮에는 기름냄새를 맡으며 혼자 전 부치고 음식 하는 엄마가 안쓰러워 피곤한 몸으로도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엄마 옆에서 뒤집개를 들고 동그랑땡과 부침개를 부쳤고 큰집이랍시고 식구들이 집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와 시끌벅적 떠들고 고스톱을 치며 술상을 거하게 벌일 때에도 나는 잠 한숨 못 잔 채 뜬 눈으로 하루를 보내다 밤 8시 30분, 다시 출근을 하기 위해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누가 나가는지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정신없는 추석 명절의 큰 집. 엄마는 내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벗어나질 못했었다. 그런 엄마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서로에게 안쓰러움과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런 명절의 연속이었다. 달갑지 않고 반갑지 않았던 기념일.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초인종이 울리는지 모를 명절.
하지만 작년 추석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내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은 일, 달갑지 않은 사람들과 억지로 어울려 지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이 몇 년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살기 싫었기 때문이다. 안쓰러움과 피곤함으로 얼룩진 얼굴로 평생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엄마를 데리고 집에서 나와 동네 카페에 데려갔다. 작년과 올해 추석은 지난 10년간의 명절과는 확연히 달랐다. 엄마는 밖에 나오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좋다고 연신 들떠 보였다. 동네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를, 벨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창문을 통해 바깥을 쳐다봤다가 카페 안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신나보이기도,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벨이 힘차게 울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했던 음료와 디저트를 받아와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는 뜨거운 아메리카노 잔을 손에 쥐고 너무 뜨겁다며 호호 입김을 불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신나 보였다.
“오름이 너 덕분에 내가 살다 살다 명절에 카페를 다 와본다.”
“전도 안 부치고 올해 명절은 기름냄새도 안 맡고, 커피 향을 맡고 있네. 너무 좋다. 진짜 너무 좋아...”
엄마를 데리고 카페에 오면서도 솔직하게는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서 괜스레 마음이 울컥했다. 명절은 당연히 그렇듯, 큰며느리로서 연휴 내내 기름냄새를 맡고 손님맞이를 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사람. 30년이 훨씬 넘게 집안 주방을 벗어나지 못하던 한 여자의 삶이 순간 내 마음을 세게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그날 엄마와 카페에 앉아서 카페 안 사람들의 즐거운 얼굴도 보았다가,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 풍경도 올려다보았다가 엄마가 들려주는 어릴 때 내 모습에 깔깔거리기도 했다가 내년 추석에도 또 커피를 마시러 오자는 약속을 하며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2024년 추석.
지난 1년간 나에게 유의미한 변화가 많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기만 바빴던 하루하루에 제동이 걸렸다. 그 제동은 나의 생각과 의지로 가능한 것이었다. 드디어 이제야 나에게 진짜 내 삶의 목적이 생겼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내 인생키를 설정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하나씩 방향키를 만져보고 매뉴얼을 익히다 보면 나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반드시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내 인생은 내가 온전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제 나의 비행을 시작할 때다.
2024년 9월 18일 오전 06시 06분. 매일 일어나던 똑같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떠 향하는 곳이 달랐다. 오전 07시 40분,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선다.
2024년 09월 18일 오전 08시 40분, 자유를 향해 출발한 나의 비행 시작을 기록하며,
2024년 09월 19일 오후 10:05분,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며 순항중임을 기록하며, 오늘 일기 마침.
“북쪽 길 뚫림. 출발!”
리비에르 덕분에 그들은 15,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전체 항로에서 우편기를 아끼는 마음이 으뜸이었다.
리비에르는 이따금 말했다.
“저 사람들은 행복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들은 내가 엄격하기 때문에 그 일을 좋아하는 거야.”
그는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강렬한 기쁨 또한 선사했다.
‘그들을 강렬한 삶으로 밀어붙여야 해. 그것은 고통과 기쁨을 불러오지만 그런 삶만이 중요하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야간 비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