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1] 20코스 희로애락의 김녕 & 월정리
오늘도 구름이 태양을 이겼다. 아니, 압승했다.
계획상 어제 17코스를 마무리했으니 18코스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제주 시내에서 잠시 평온을 잃을뻔하고, 도심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다음 후보 19코스는 후반부에 오름이 있었는데, 하늘을 보니 하루종일 태양이 이길리는 만무해 보였다. 그리하여 오늘의 올레길은 김녕과 월정리를 지나치는 해안도로인 20코스로 당첨! 오름은 없었지만 17.6km 중 절반 이상이 숲을 가로지르는 길이라 물웅덩이가 많았다. 오늘은 내 두 발도, 기분도 위아래로 뛰게 한 나에게로 ‘점프’하는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빗속에서 올레길을 걸으며, 5시간 동안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했다.
[희]
희로애락의 하루는 김녕리에서 시작되었다. 제주 시내를 걷다 와서 그런지 김녕해변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구름뒤에 가려진 태양이 잠깐이라도 인사해 주기를 기다리며 검푸른 바다를 보고 있자니 여행 4일 만에 진짜로 엽서 속 제주도에 온 것 같았다. 바다와 나만이 있는 동네에서 혼자서 20분 동안 사진 찍고 감탄하고 난리가 났다. (아직 못 가본 올레 동쪽 코스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하늘에는 부드러운 뭉게구름 조각이 성난 적란운의 소리에 못 이겨 떠밀려가고 있었다. 분명 몇 시간 안으로 억새비가 내릴 조짐이었다. (어제 구름이 태양을 이긴 것에 감명받고 구름 공부 좀했다. 적란운이란~) 지레 겁을 먹고 오늘은 카페에서 바다멍이나 할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 덕분에 올레꾼은커녕 길가에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에 오늘 하루는 비와 나의 데이트라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아니면 언제 또 내가 비 오는 날 일부러 걷겠어~’ 긍정 마인드 장착 완료.
[노]
하지만 내 마음은 제주도 날씨처럼 빠르게 변했다. 우산에 가려져 주변 풍경이 아닌 땅만 보며 걷고 있자니 고새 비에게 투덜대고 있었다. 비가 그쳐 우산을 접으면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고, 참다못해 우산을 피면 다시 빗방울이 멈추고. 자꾸 약 올리는 먹구름은 땅 위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나를 보며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있는 듯해 더더욱 얄미웠다. 진흙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걷다 보니 점점 시간이 빠듯해졌다. 아직 중간 지점도 오지 못한 터라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더 불안해졌다. 평온은커녕 즐겁지가 않았다. 하늘도 어두웠고, 내 마음도 어두웠다. 이거야 말로 며칠 전 길가에 할머니가 얘기하신 ‘내돈내고,’ 내 돈 내고 내가 고생이었다.
어제 평온을 위해 마음 마사지를 해주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불안해지다니. ‘제주도에서도 이런데 현실에서 어떻게 평온해지겠다는 걸까?’ 업무 중에 갑자기 ‘저, (마음) 마사지 좀 받고 오겠습니다.’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내가 제일 평온을 유지하기 어려운 곳은 회사였다. 아침, 점심, 저녁 마음 마사지 루틴이 아닌 회사 생활을 하는 ‘그곳’에서, 이렇게 비가 내리는 ‘그 순간’, 평온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통계적 관점으로 단순하게 모수가 많은, 즉 내가 가장 많이 겪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회사,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말! 딱 마침 바위로 가득한 좁은 숲 속길이 나왔다. 조심조심 걷는 만큼 말도 느려졌다. “할—수—있—다.” 맙소사. 정말 신기했다. 말만 느리게 했을 뿐인데 마음에 평안이 들어왔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혼자서 아—야—어—여— 느리게 소리를 내며 10분 정도 걸어보았다. 사나운 비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흡도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맙—소—사” 혼돈 속에서는 나무늘보가 답이었다.
[애]
말을 천천히 하며 걸으니 마음도 평온해지고, 타이밍도 맞아 뜻밖의 선물도 받았다. 월정리 해변을 지나는데 아주 잠깐 비가 멈추다 못해 햇살이 빼꼼했다. 무지개와 함께! 잠깐이지만 미웠던 비에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올레길을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연 속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서 온전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연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바다도 파도도 나무도 귤도, 더 빨리 자라려고, 더 빨리 파도치려고 하지 않는 곳이기에. 그리고 이곳에서는 나도 순리대로 생각하고 걷게 된다.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간다. 내가 거의 매일 하는 운전도 생각해 보면 도로에 절대 ‘빠르게’라는 글자는 없다. 오로지 ‘천천히’라는 글자만 있다는 것도 새삼 웃프다. 나도 순리대로 가지 않고 빠르게 가려다 차선을 잘못 타고 결국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비도, 해도 순리대로 왔다 갔다 하는 자연 속에서 무지개를 보여주려 기다렸던 태양에게 빨리 나오라고 다그친 내가 옹졸해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이기에 천천히도 빠르게도 아닌 순리에 맞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금 느꼈다.
5시 반이 넘어가자 정말 어두워져 (말은 천천히, 발걸음은 빠르게) 경보를 했다. 비로 인해 주변 경관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일상 속 평온을 위한 “느리게 말하기”라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게 되어, 이것 하나로 오늘도 정말 잊지 못할 올레 20코스 여정이 되었다.
[락]
숙소에 돌아와 재미 삼아 아나운서 테스트를 해보았다. 26초 내에 읽으면 ‘매우 빠름’이라는데 나는 25초 만에 읽어버렸다… 나름 느리게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하^^
마음아, 앞으로 천천히 걷자.
천천히 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