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섬의 자구도래지에는 ‘철새’라 불리는 방문객들이 각자의 노을과 함께 방문한다. 그 덕에 그의 하늘은 유난히 다채롭고 아름다워 사람들은 이 곳을 노을의 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왜가리 선생님의 거처는 자구도래지 안에서도 푸른 달의 붉은 숲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찾아가기 어렵다 느끼는 이들이 많지만 의외로 통로는 언제나 열려있다.
붉은 숲과 푸른 달.
푸른 달은 숲의 붉음 정도로 계절을 가늠한다. 숲 아래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붉은 기운이 생명을 어루만지며 숲을 채우고 능선 끝에 이르러 그 붉음은 소리 없이 바스러진다. 달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매번 허공에 얼음 가루를 뿌려 한 시기가 지나감을 세상에 알린다. 그 후 얼마간 숲과 허공은 초록빛으로 물든다. 숲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둘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푸른 달과 숲이 다시 마주 앉는다. 그러면 숲은 다시 아래서부터 붉은 기운을 띠기 시작한다.
윤이가 숲에 당도했을 때는 붉은 기운이 이미 꽤 높이 숲의 상단으로 올라와 있었다. 어쩌면 얼음 가루의 장관은 다음 시기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이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래 걷지 않아 숲의 푸르름 사이 커다란 나무집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 곁에는 눈에 띄는 빛병과 왜가리 문양의 문패가 걸려 있어 그 곳이 윤이가 찾던 집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이는 나무집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뜰에 자라난 희귀한 식물들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무수히 많은 작은 빛들이 그 사이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찾아오는 길은 정신없이 지나왔지만 막상 문 앞에 서자 한 발 내딛는 것이 주저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망설임은 커져갔다. 그때 작은 빛 하나가 윤이의 손끝에 와 닿았다. 마치 깜빡 잠에서 깨어난 듯 윤이는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고르고 나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윤이씨,”
안쪽에서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단정한 공간의 한 가운데의 책상에 반듯한 자세의 동그란 안경을 낀, 진주 목걸이를 한 왜가리 선생님이 윤이를 보며 빙긋 웃으며 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편지 잘 받았어요. 하지만 이렇게 직접 듣는 건 또 다르겠죠,”
왜가리 선생님이 부드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직접 뵙고 싶었어요,”
윤이가 반갑게 인사했다.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마음을 먹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모두 정말 쉽지 않잖아요,”
왜가리 선생님의 말에 윤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가요? 저는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책이나 비교는 불쑥 튀어나오거든요.”
“여기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 길을 나서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답니다.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거든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정답은 없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당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함께 찾아볼 수 있을 거예요,” 왜가리 선생님이 부드럽게 권유했다. 윤이는 잠시 망설이다 고백했다.
“사실 지난 마지막 편지에서 말씀드린 그림책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완성하고 나서 오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 그냥 무작정 길을 떠났어요.”
“고마워요. 그 자체로도 큰 용기를 냈네요, 완성하고 나서 또 오면 좋죠.”
왜가리 선생님이 미소 지었다. 윤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림책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만 매몰되어 있던 동안 자신이 이미 용기를 내어 여정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왜가리 선생님은 싱긋 웃음을 지으며 초콜릿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이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했죠? 기다리면서 미리 구해 두었어요.”
초콜릿으로 가득 찬 커다란 바구니가 윤이와 그 사이에 놓였다.
윤이는 초콜릿을 한가득 먹으면서 왜가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은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마음의 실타래가 스르륵 풀리기도 했다. 또 어떤 때에는 새로운 물음표들이 떠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