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도 러브레터 받는 여자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노래방이 삶의 일부였던 그 시절. 나는 노래방에 가면 무조건 박정현의 '편지할게요'를 불렀다. 엄청난 고음에 느린 노래라서 노래방에서 부르면 민폐가 되는 대표적인 곡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5년여 동안 불러댔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 때 게임에서 지는 바람에 노래를 불러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박정현의 "편지할게요"를 불러서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모든 동기와 선배들에게 "우~~~" 하는 엄청난 야유를 받기도 했다. 세상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긴장 긴장해서 물만 마셔대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야유를 퍼부울 수 있다니. 그 대상이 나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이번 판은 나가립니다. 다음 판을 기대하세요." 그 노래를 세네 번은 더 듣고서야 '남행열차'를 부르고 무사히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이 노래는 남편과 데이트할 때까지 도 불렀던 여전한 나의 애창곡. 남편 왈 자기도 이 노래 별로 안 좋아한다고. 참 이 노래 좋아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애잔하고 기교적인 멜로디와 대비되는 적극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도입부.
"꼭 편지할게요. 내일 또 만나지만
돌아온 길엔 언제나 아쉽기만 해.
더 정성스럽게 당신을 만나는 길,
그대 없이도 그대와 밤새워 얘길 해."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야만 쓸 수 있는 편지. 그 정성이 노래에서도 느껴져서 내가 이토록 이 노래에 애정이 있나 보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성이 가득 들어간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엄마가 옷을 사주는 것 보다 니트를 직접 짜주는 게 좋았고, 친구가 생일카드를 사서 주는 것보다 종이 접기를 예쁘게 하거나 종이를 꾸며서 생일카드를 써주면 더 소중하게 간직했다.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생일 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게 뭐야?라고 묻는다면 고민하지 않고
"나는 편지가 제일 받았을 때 좋더라."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의 남편이 나에게 처음 편지를 써주었을 때에도 너무나 기뻐서 생일 축하한다는 작은 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또 읽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카드를 받은 날만 스무 번 넘게 읽으면서 행복해했다. 나의 외모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이 소녀감성은 나도 그 뿌리를 모르겠다. 암튼 그게 샤넬백이 아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돈 안 들이고 나를 웃게 하고 설레게 하는 게 있다니!
그리고 편지나 카드가 주는 기쁨은 유지기간도 생각보다 꽤 길다. 지금까지도 나는 남편이 처음 준 카드를 가지고 있고, 가끔 봉투에서 꺼내 보는데 그 순간부터 입가에 웃음이 감춰지지가 않는다. 10년도 전에 받은 카드인데 아직도 나를 웃게 하니 그 효력이 얼마나 긴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이게 뭐야. 인터넷이 일반화되기도 했거니와 결혼 9년 차 부부가 편지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내가 편지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남편은 이미 꽈악 잡은 물고기인 나에게 두 번 정도 편지를 써주는 거에 그쳤다.... 편지는 쓰라고 강요해서 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편지를 받겠다고 남편에게 화를 낼 수도, 압박을 가할 수도, 벌을 줄 수도 없으니
편지가 너무 고프지만 그걸 써줄 사람은 현재 남편밖에 없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는 나의 어딘가 모를 처량한 신세...
그런데 며칠 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편지를 받았다. 그것도 편지지부터 손수 제작한 글씨 하나하나에도 사랑이 느껴지는 편지를.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사랑 '그녀'로부터였다.
사랑가득한 그녀의 편지만 3세인 그녀. 나의 사랑 딸이 유치원에 다녀와서 내게 열어보라면서 종이를 주었다. 겉에는 하트가 뿅 뿅뿅뿅 그려져 있고, 이연주라는 천진난만한 글씨체로 내 이름이 쓰여있고,
안에는 나의 얼굴과 사랑해요 라는 글씨가 정성스럽게 쓰인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아름다운 러브레터였다.
그런데 사랑해요의 '랑'자가 좌우가 바뀐 걸 보더니 나에게 생전 편지를 쓰지 않던
아들이 나서서 편지를 써주었다.
"채윤아, 이렇게 쓰는 거야."라는 안 해도 될 말과 함께 하하하하 짜식 무드 깨고 있어 난 글씨가 뒤 바뀌어도 그 순수함이 느껴지는 러브레터가 좋다고^^
무뚝뚝한 글씨지만 너무 좋다내가 편지를 받고 너무 좋아하니 채윤이도 신나서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그렇게 좋아?"라고 묻길래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응, 그렇게 좋아!"라고 답했다. 함박웃음과 함께
그 뒤로 딸은 유치원에서 항상 편지를 써서 나에게 준다. 매일매일 받는 편지인데도 늘 즐겁고 고맙다. 그런데 요즘 노느라 바빴던 모양인지 이 녀석 집에 왔는데 평상시와 달리 나에게 아무것도 안 준다. 어라~ 이거 이거 억지로 써서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녀에게서 또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오늘도 나는 너를 마음껏 사랑하련다. 내 인생 최고 많은 러브레터를 지금까지 받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살랜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한테 편지를 받을 수 있어서 고맙다. 엄마한테 편지 써줘서 정말 고맙다. 남편! 이제 남편 편지 필요 없다 안 기다린다고! 그래도 써주면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