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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운선 Jan 26. 2024

천천히 걸은 날

눈이 왔어요

우유가 마시고 싶었다. 우유가 있다면 몇 알 남은 딸기나 하나 남은 바나나와 함께 갈아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팠고 간단하게 요기가 하고 싶었던 거다.


지금은 밤 10시가 되어 가는데 곧 있으면 마트 문을 닫겠지. 하지만 밖은 춥고 길은 미끄러울 텐데. 뭘 먹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인데… 조금 지나면 허기짐도 사라질 것 같은데… 이 시간에 무엇인가를 먹는 게 건강에는 안 좋을 거야, 아니 너무 허기져도 잠이 잘 안 오기도 하지. 나갔다 올까 말까 망설이다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불이 켜진 상점보다 불이 꺼진 상점이 많았다. 큰길은 눈이 녹았으나 나무 위나 인도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쌓여있었다. 마트로 가는 길은 경사가 살짝 있어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걸어야 했다. 작년 겨울에 이 길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눈이 더 쌓여있고 살짝 언 것 같기도 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되도록 미끄럽지 않을 것 같은 바닥을 골라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늦은 밤 노는 가족(과슈 ⓒ신운선)

마트에 가까이 갔을 때 눈 위에서 노는 가족이 보였다. 아이들은 서로 잡으려고 뛰어다녔다. 눈을 던지며 도망가다가 돌아서서 달려오기도 했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두려움 하나 없이, 오히려 미끄러져서 넘어지면 그게 더 재미있다는 듯이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나는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을 본 것 마냥, 그 가족의 노는 모습이 반가웠다.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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