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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Apr 26. 2024

어묵볶음과 붉은 노을과 아기 뒤통수

2024년 4월 25일 단 하나의 명장면

나에게는 5살 딸, 3살 아들이 있다. 올해 딸이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엄마들 관계'라는 것이 시작됐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등하원을 하며 매일 마주하는 얼굴들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인사를 나누고 길에 서서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정도다. 아주 가끔 아침을 같이 먹거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나에게는 이 정도도 꽤나 큰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함께 수다를 떨고 있지만 서로 몇 살인지, 아기 낳기 전엔 무슨 일을 했는지도, 남편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질문은 피하다 보니 자식 이야기 아니면 겉도는 이야기만 나누게 된다. 물론 이런 관계를 거쳐 진정한 친구가 되기도 한다는데 우린 아직 탐색중인 것 같다. 자식으로 엮인 인간관계다 보니 내 행동이 자식의 얼굴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러워지고, 껄끄럽다고 안 볼 수 있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실수할 바에야 차라리 좀 어색하더라도 식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딸이 사교성 없는 아이인지라 나라도 엄마들하고 잘 지내면서 아이를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려는 얄팍한 속셈 + 유치원에서 만난 애기엄마와 절친이 되어 동육아하는 친구들을 보며 생긴 기대감으로 시작했는데 엄마들과 커피라도 마시고 온 날에는 낮잠을 자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로 지쳐버리고 만다.


나는 주부로서 재능이 없는 건지 집안일도 애를 써야 그나마 더럽지 않은 정도로 만들 수 있고 육아도 기를 쓰고 해야 겨우 먹이고 씻기고 재울 수 있다.

수납이며 가구 배치, 철 지난 옷 정리 같은 건 늘 내일로 다음 주로 미루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아직 거실에 있다.) 엄마표 영어고 몸으로 놀아주는 육아고 뭐고 유튜브 없으면 단 하루도 못 버틴다.


'난 왜 남들이 다 한다는 애기엄마 친구 하나 만드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들까.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피곤한 인간일까.'


어제저녁 언제나처럼 아이들을 TV 틀어주고 (자책+1) 녁으로 먹을 영양가 있고 맛 좋은 음식을 준비해두지 않아(자책+2) 황급히 냉동된 어묵을 데쳐 해동시킨 뒤 볶았다. 어묵을 볶으며 머릿속은 계속 복잡해졌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나는 왜 이렇게 체력이 저질일까. 나는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어려울까. 나는 왜. 나는 왜.'


앗! 자책하며 무심코 하나 집어 맛을 본 어묵이 너무너무 맛있다.

어묵볶음은 따뜻할 때만 맛있는데. 냉장고에 들어가면 맛없는데. 아까웠다.

갑자기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시우엄마'.


시우는 우리 옆옆집에 사는 은유 유치원 친구다. 얼떨결에 서로 번호를 주고받았지만 단 한 번도 통화를 해본 적 없는 사이다. 신호가 가자마자 후회가 몰려왔다.

'아. 좀 오버 같은데. 불편할 것 같은데. 시우가 어묵알레르기 있으면 어쩌지. 이미 밥 먹었으면 어쩌지. 반찬을 받았으니 뭘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가지면 어ㅉ..'


"여보세요."

"아 시우엄마! 은유엄마예요. 제가 어묵을 볶았는데 너무 많이 볶아서요. 혹시 시우 밥 안 먹었으면 좀 가져다 드릴까요?"

"아유. 그러면 좋죠. 시우 어묵 너무 좋아해요."


반찬통에 어묵을 담아 앞치마도 벗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섰다.  3초도 걸리지 않는 거리. 노크를 하자 시우엄마가 잠옷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손에는 짜 먹는 요구르트를 한 통 들고 계셨다.

"고마워요. 이거 애기들 밥 먹고 후식으로 세요."

"네. 내일 등원할 때 봬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흐뭇하게 돌아서니 3살짜리 우리 둘째가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맨발로 내 앞에 서있다. 1분도 안 되는 사이를 못 참고 열린 문틈을 밀고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이 눔!! 이 귀여운 눔!!"

내가 잡으려 하자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쫄쫄 도망간다. 노을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 있는 저녁이었다. 복도에 멈춰 서서 물감을 쏟은  붉은 하늘과 도망치는 내 아기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것이 오늘 나의 명장면.


'이웃과 반찬 나눠먹기'는 내 기준 <응답하라 1988>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혼밥 레벨로 비교해 보자면 혼자서 삼겹살 맛집에 줄을 서서 입장해 혼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수준이다. 이것을 해냈다. 나는 겨우 이 정도 일로 주부로서 심지어 인간으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매일 같은 하루.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고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채 늘 같은 집안일을 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육아를 하는 하루. 나는 어쩌면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가 된 듯 권태감과 지루함에 짓눌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일도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분명히 오늘과 같은 하루가 반복되겠지만,

내 눈앞의 이 아름다운 노을과 도망치는 저 아기의 뒤통수는 지금 이순간 확실한 기쁨.


오늘 하루  하나의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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