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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Mar 25. 2020

에필로그 -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며칠 전 사무실 직원이 '시간 참 잘 가네요.'라며 인사하던데, 책상에 앉아 달력을 보니 한 분기가 지나가고 있다. 정말 시간이 잘 가는구나. 인간의 뇌는 반복되는 것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휴리스틱으로 넘어가는 거지. 일상도 매번 반복되면 기억 저장장치에 남는 게 없고, 기억에 남지 않으면 그 시간은 우리 머릿속에 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늘 쳇바퀴 돌듯 사는 아빠와 같은 직장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은 같은 일상의 반복이 계속되고,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한 터라 웬만해서는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의미 없는 물리적 시간, 즉, A시점에서 B시점 간의 물리적 차이를 길게 보내는 것에 있지 않고, 매 순간 기억에 남는 뭔가를 만들어 내며 사는 것에 있지 않을까? 네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우리와 함께하는 기억의 양은 줄어들었고, 남은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생활, 그리고 그 이후도 우리가 같이 하는 기억 속에는 별로 남지 않겠지. 대신 넌 그 기억들을 친구들과 연인과, 때로는 다른 누군가와 채울 것이다. 아빠로서는 섭섭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한동일 씨가 지은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라틴어라... 일단 매력적이지 않니? 대부분 아빠 또래라면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라틴어는 역시 '카르페디엠(Carpe Diem)'이다. 1989년 늦은 봄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아빠는 친구와 부산의 서면에서 이 영화를 봤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그 감정을 어찌할 바를 몰라, 다시 보자며 극장에서 나가지 않고 청소 아주머니 눈을 피해 그대로 다시 앉아서 한 번 더 봤었던 영화다. '카르페디엠'은 원래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송가 마지막에 나오는 것으로,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라는 문장으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라는 뜻이란다. 즉, 내일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말고 오늘에 의미를 두고 살라는 뜻이다.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캡틴' 키팅 선생이 강조하는 말이었지. (그때 고등학생으로서는 봐서는 안 되는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단어는 수많은 의역을 거쳐서 '지금 현재를 즐기라'는 쾌락주의적 해석이 되기도 했었다. 모 카드사 광고에도 쓰이면서 내일은 모르겠고 카드 긁으며 막살라는 거였다. (가끔 지금의 너를 보면 그럴 때가 있긴 하지.) 어쨌거나 우리는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과거는 말 그대로 이미 지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늘 현재에 충실해야겠지. 내일을 너무 기대하지 말고...  


라틴어의 매력은 영화 해리포터(아빠랑 같이 본 기억은 나니? 이것도 네가 너무 어릴 때라서...)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주문들이 라틴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서양인들에게도 라틴어는 독특한 위치임에 틀림없나 봐. 특히 디멘터들을 물리치기 위해 외쳤던 '익스펙토 페트로눔 (Expecto Patronum)' 같은 건 멋있지. 영어로 하면 'I exptect protection' 쯤 되나? 영어로 했음 좀 머쓱했을 텐데, 근데 라틴어로 하니 어쨌든 있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한동일 씨의 <라틴어 수업>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마음에 들었던 문장은(사실 그 책은 아빠보다는 한참 젊은 친구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었기에 다른 건 별로 기억에 없다.)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첫 문장으로 사용한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라는 것이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저는 잘 있습니다"라는 뜻이란다. 심지어 이 문장을 줄여서 S.V.B.E.E.V. 약어로 쓸 정도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당시 편지지가 워낙 비싸서 줄였다는 설명도 재미있긴 했다. 


이 문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나의 안부보다 상대의 안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좋아서다. 그리고 내가 편한 건 당신이 편하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마음에 들었단다. 요즘처럼 모든 게 개인화되어가고, 곁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경쟁관계에 놓이기 마련인 관계에서, '네가 편해야 내가 편하다'는 건 많은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상대를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로 확장해 보면 더 명확해진다. 비록 네가 개인주의자로 산다고 할지라도 문유석 판가가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말하는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로 남기 위해서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얘기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서로 반목과 질시, 경쟁만이 남아 있다면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행복할 수는 없다. 이건 결국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이해하고, 그래서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넓혀 생각할 문장이기도 하단다. 네 이웃이, 네가 사는 사회가 안녕해야 네가 안녕하다.  


네가 서른이 되었을 때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아빠는 늘 궁금하다.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글들을 쓰는 이유도 결국은 네가 좋은 어른으로, 훌륭한 사회 구성원으로 네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 바탕에는 네가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지. 하고 싶은 얘기가 이게 다가 아닌데, 그리고 어떤 것은 그런 의도가 아닌데 다르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여기서 한 번 마무리 하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거야. 


부족한 아빠(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었다.)지만 아빠 딸로 자라줘서 고맙다. 우리가 같이 하는 나머지 삶도 행복하자.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잘 지내 우리 딸? 나도 잘 지낸다. 부모란 그렇다. 네가 잘 지내야 내가 편하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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