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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쉐퍼드 Feb 26. 2018

나 돌아갈래~! 이러려고 온 게 아니야!

-공항 노트북(laptop) 분실 음주운전의 오해 너덜너덜  초기 정착기

2014년 1월 6일. (출국 당일)

저는 미리 짐을 보내고도 이민가방 5개 핸드캐리 2개 배낭 2개를 바리바리 들고 인천공항을 떠났습니다.

제가 가게 된 오클라호마는 미국의 중부지방 달라스 바로 위에 붙어 있는 시골이었죠.

인천에서 직항도 없는터라 저는 달라스에서 한번 경유를 해야 했습니다.

티켓을 살 때는 별생각 없이 갈아타는 시간이 제일 짧은 걸로 했어요. 뭐 얼마나 걸릴까 싶어서요.

하지만 미국의 입국심사와 그렇게 줄이 길 줄은 몰랐지요. 그러고 공항 검색대까지 통과하고 나니 시간이 정말 촉박해 숨이차게 뛰고 하며 간신히 오클라호마행 비행기를 올라타고는 헉헉 거릴 때 딱 떠오른 것이 있었어요.


공항 검색대에 노트북(laptop)을 놓고 온 거예요!!

미국 온다고 프로그램 필요한 것도 싹 깔고 한 노트북과 태블릿.


오클라호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줄줄 눈물이 어찌나 나오든지요. 제가 원래 뭘 좀 잘 잊어버리긴 해요.

아주 어릴 때부터 리듬악기 준비물이면 신발장 앞에 놓곤 담날에는 폴짝 뛰어넘어 학교 가버리고,

뭐 중요한 거도 잘 잊어버리고 그렇긴 한데, 그 긴장을 하고 오랜 시간 마음에 그린 중차대한 날에 이런 실수라니 제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당시 공항에는 제게 이곳을 추천한 선생님이 소개하여주신 현지 교민이 절 픽업해 주시기로 했어요. 너무 창피하고 그러면서도 속상하고 암튼 그분을 만나 공항을 나오려는데 한국에서 오클라호마로 바로 붙인 짐이 다 도착을 안 한 거예요. 전 멘붕상태가 되어 공항직원에게 항의도 못하고 픽업을 나와주신 분이 해결해 주셨죠. 제가 유학 기간 내내 엄청나게 친해지기도 하고 또 그보다는 신세 지기도 한 그분은 이미 도착한 그 많은 짐들을 3층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로 날라주셨고, 진수성찬으로 저녁까지 한상을 차려주셨어요. 사실 밥은 입에 잘 안 들어갈 줄 알았는데 거의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탄 상태라 먹으니 맛있고 든든한 것이 좀 기운이 나긴 하더군요.

달라스 공항은 전화를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생각도 안 나고. 다행히 집은 미리 얻어놓았지만 인터넷도 안되고, 정신도 없고. 공항 보안검색대 ( security check points)이라는 단어도 어떻게 말할지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중학교 때부터 저의 가장 제일 친한 친구가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어서 연락을 했어요. 그 친구가 전화를 해주고 다행히 보안검색대 안에서 저의 노트북을 다시 찾아서 다음날에 페덱스 (60 불! 정도 들었어요)로 찾았지요.

미국서는 사실 5불 10불이 한국에서 그냥 또 가볍게 쓰는 만원보다 훨씬 비싸게 느껴져요. 그런데 60 불이라니 사실 두고두고 속이 쓰렸어요.


미국에서 힘이 되었던 고모의 편지, 1040불 렌트비를 줬던 아파트는 제법 넓은 방 2개 화장실 2개 쑥 걸어 들어가는 큰 옷장까지 포함해 살기는 편했어요. 가구는 거의 저런 간이 조립식 가구들만 주로 쓰긴 했습니다.

첫날 도착했을 때 얻어먹은 저녁입니다. 낯선 땅에서 따뜻한 밥 한끼는 지금도 잊지 못할 감사함으로 남아있죠.


2014년 1월 8일  (도착 다음날) 

정신없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어요.

아파트 관리실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하고 데빗카드를 만들고, 내 학교에 가서 개강 신청하고 아이들 학교도 등록해야 하고, 필요한 물건들도 구입해야 하고, 운전면허도 접수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미국에서는 신발만큼 중요하다는 차를 사야 했고요. 매일매일 현지 교민과 먼저 유학 오신 선생님들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몇 개씩 일을 처리했어요. 특히 운전면허는 한국에서부터 문제지를 출력해 비행기 안에서도 풀어보고, 또 가자마자 제게 연수를 시켜주신 분도 있고 했어요. 왜냐면 오클라호마는 차 없이는 도저히 돌아다닐 수가 없는 시스템 (인도, 신호등이 거의 없어요)이고 아이들이 셋인데  빨리 제가 운전을 해서 새로운 환경에서 기죽고 힘들 텐데 재밌는 곳 많이 보여주고 싶어서요. 그때가 겨울 방학 기간이라 학생들이 운전면허를 보기 위해 많이 온다고 일찍 가서 접수를 하라고 했지요. 새벽에 긴 줄을 서서 마침내 접수를 하려고 하는데 운전면허국 공무원이 저를 위아래로 계속 째려보는 거예요. 저는 시차도 적응 안되고 난생처음 하는 미국 생활 기가 죽을 대로 죽어서 눈만 깜빡였어요. 그랬더니 저보고

"너는 왜 음주 운전을 두 번이나 해서 면허를 딸 수 없는데 여기에 왔니?" 하더군요.

저는 놀라서 "야 내가 지금 미국을 처음 오는 거야. 무슨 소리니?" 대답하니,

공무원은 더 단호한 얼굴로 "아니야 아니야 너랑 비슷한 키에  눈 색깔 이름도 같고 생년월일도 같은 여자가 DUI (Driving under the influence of alcohol or drugs; 음주나 약물을 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적발되는 미국에서는 아주 심각한 범죄)를 했어. 그게 네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어."

제 머릿속에 그때 하나의 사건이 떠올랐어요.


과거 회상~~ 2013년 10월 중순 (한국에서 비자 인터뷰 당시) 

미국 비자를 받을 때 영사관이 저보고 계속 묻는 거예요.

 "너 2007년에 미국 갔지?"
"잉? 2007년 아니요.  전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 그때 쌍둥이 아들을 낳느라 거의 누워있다가 출산을 한 해에요."


그때 영사가 저에게 키도 묻고 얼굴도 뚫어져라 보고 애는 몇 명 낳았냐고 물어보고 세 아이의 남편은 다 같은 사람이냐고 귀신 신나라 까먹는 소리만 하면서 유학과 관련된 질문은 단 하나도 안 하더니 

"난 지금 너에게 무슨 비자가 나온다고 알려줄 수 없어.
내가 너를 좀 더 조사해 볼 거야. 집에 가서 일주일만 기다려." 

전 일주일 동안 무지 마음을 졸였고,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를 본 적은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5년짜리 비자가 나왔고 전 그냥 정신세계가 이상한 영사를 만났으려니 하며 이 일은 바쁜 다른 것들 속에 묻혀서 지나가 버렸지요. 머릿속에서 이 사건이 떠오르면서 나와 이름과 생일이 같은 여자가 미국에서 음주운전을 한 전과자로 기록이 되었구나라고 알았지요. (말씀드렸듯 이곳이 시골이라 제 최신식 전자여권 따위는 읽을 수 있는 기계는 없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이름, 겨울 출생,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한국인은 흔히 갖고 있는 눈동자 색. 76년생 김은희는 그렇게 미국의 한 시골 운전면허국에서 음주운전자 혹은 약물복용자가 되었습니다.

2014년 1월 8일  (오클라호마 운전 면허국) 

해결 방법은 이랬습니다. 제가 아니 제 동명이인이 미국의 Georgia 주와 North Carolina 두 개주에서 음주운전을 한 것을 내가 한 게 아니라는 담당 운전면허국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 편지를 "not me letter", "not the same person"이라고 하더라고요. 전 너무너무 억울했어요. 치욕스럽다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미국 공무원 아저씨는 얄짤 없었어요. 사실은 전 확실히 느꼈어요. (적어도 제 기분은.. ) 그분이 저를 음주운전자 취급한다는 것을요. 일단은 제가 서류로 증명하기 전엔 범죄자 일 수밖에 없었어요. 미국 땅에서 저를 믿을 만한 사람도 신분도 제게는 없었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일단 저 같은 경우가 있나 찾아봤더니 미국은 땅이 워낙 크고 이런 일이 잦아서 그런지 저 같은 사람을 일컫는 용어도 있더라고요. " miss identification victim (잘못된 신분정보의 희생자) "이라 칭하는데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해당 주의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 운전면허국의 공증이 필요하였고요. 노트북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도 제가 해결하기 힘든 사건이었어요. 영어 선생님이고 미국에 유학을 , 그것도 영어교육을 전공으로 갔지만, 현지인들도 잘 안 겪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쉽지는 않은 (제게는) 관공서 전화통화를 능숙하게 (더구나 제가 범죄자의 오해를 받는 상황에서) 처리하는 것이 참 힘들었어요. 전화를 받는 경우가 드물어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겨야 하는데 거기서 듣고 전화를 다시 걸어줄 만큼 신분(?)이 확실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자신만만 떠난 유학에서 민폐의 아이콘이 되다.

이 문제의 해결을 도와줄 사람을 고민하다가 학교에 외국에서 온 학생들을 도와주는 업무를 담당하는 Jennifer를 찾아갔어요. Jennifer에게 제 사정을 말하니 처음에는 아마 제 입국 정보가 오클라호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그럴 거라며 좀 기다려보자는 거예요.  답답했지만 별 수 있나요. 일주일이 지나도 제 정보가 업데이트가 안되고 제가 운전면허국에서 확인을 해오자 그제야 Jennifer는 두 개 주소지의 담당 운전면허국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 전화를 걸고 우리가 이 학생에 대한 정보를 보낼 테니 문서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7-10일 안이면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답없는 너", 미국 운전면허국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7-10일에 오지 않았습니다. ㅜㅜ 전화를 안 받아 며칠씩 걸리고, 겨울에 폭설이 내려서 그쪽 경찰서가 출근을 안 해서 연기, 제니퍼가 출장, 휴가를 가서 연기..  한 개의 주에서는 도착했는데 North Carolina에서 보낸 편지가 사라지고.. 암튼 어떻게 운전면허를 따는 게 이렇게 힘들단 말이냐..  뭐 시험이라도 봐서 떨어진 게 아니고.. 가슴을 쳐봐야 저 혼자만 답답한 거죠 뭐. 오클라호마는 국제면허가 인정이 안돼요. 그래서 집에서 만들어간 무사고 경력 증명서, 국제면허 다 소용없고요.  저는 면허 없이 운전하다 걸리면 경찰에 벌금 내는 거죠. 지금 생각하면 내고 말면되고, 뭐 내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거나 한 게 아니니 당당해도 되는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저는 많이도 무섭고 떨려서 거기에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들어오자 멘탈이 정말 많이 약해졌던 것 같아요.

저와 제니퍼는 이 일 때문에 14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전화도 그 정도 했어요. 제니퍼도 나중엔 엉망진창이라며 열 받을 정도로 일이 꼬였어요. 아래는 4월 14일 보낸 편 지니 제가 미국 간지 석 달이 지나고 나서입니다.

Dear Eunice,
I have spoken with the DMV in North Carolina twice last week.  Finally on Friday they instructed me to fax a letter requesting that the "not same person" letter be faxed to us because the original was not received by mail.  The officer that issued the letter has to issue the new one and that officer was not in the office Friday.  I plan to call again tomorrow to verify that he got the fax and that he will be able to resend the letter by fax this time instead of by mail.
(대충 North Carolina에서 보낸 편지가 분실되어서 다시 전화하니 같은 문서를 팩스로 보내달라는 공문으로 보내라고 했다는 것)
It is such a mess!  I am so sorry that you have had to deal with it!  I have honestly never had anything like this happen before with a student.  The DMV is the WORST!!  
(정말 엉망진창이야! 이런 일 당해서 정말 유감이다! 정말 이랬던 학생은 없었어. DMV정말 최악이다!)


2014년 4월 17일 (드디어 도착한 그 서류 "Not me letter", 나 진짜 아니라규~!)

암튼 저는 이렇게 도착한 "Not me letter"를 들고 오클라호마 DMV 갔어요. 여기도 제가 이미 너무 여러 번 왔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은 제 얼굴을 알게 되었죠. 그날로 접수를 하고 필기시험을 보고 이제 일주일 후 실기만 남았지요. 미국 운전면허 시험의 실기는 시험관이 옆에 같이 타서 채점을 하는 방식이에요. 깐깐한 분을 만나면 더 떨어질 확률도 높고 실제로 그래서 무지하게 오래 걸리신 분도 있어요. 시험을 하루에 많은 인원이 보지 못하고, 새벽부터 줄 서서 선착순으로 앞에서 일정 인원만 볼 수 있는 거죠. 아무리 일찍 가도 잘릴 수도 있고 복불복인 시스템. 그 다음날 근데 제가 일찍 갔음에도 불구하고 제 앞에서 오늘의 시험 인원이 끝나버렸어요. 낙심하고 있는데 제 얼굴을 아는 시험관이 저보고 이리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말을 하더라고요. "오늘 너는 시험 보게 될 거야." 그리고 나중에 약속한 시간에 제 차를 가지고 시험관을 기다리는데 아까 그분이 제 자리 옆에 감독관으로 타게 되었습니다. (이건 그냥 우연인 것도 같아요 시험관이 사람을 골라 가는 건 아니던데) 보통 운전면허 시험장 사람들이 무섭다 함부로 한다 하는 후기들이 많았는데 저는 너무 무사히 이날 한 번에 면허를 따게 되었죠.

그간의 맘고생이 한 번에 녹고 감사가 파도처럼 몰려오더군요.


 

운전면허를 딴 날, 4월 24일!!

그동안 수고해준 Jennifer에게 맛난 거 사가지고 달려가 축하하며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게는 고마움과 원망이 반반이었어요. 워낙 미국 문화가 빠르게 일을 처리하지 않다 보니 제게는 너무 자기 일이 아닌 듯 슬렁슬렁해주는 거 같아 좀 속상했거든요. 근데 지금 보니 참 고마웠네요. ^^;;

또 하나의 감사는 면허가 없는 기간 늘 새가슴으로 운전을 하고 다니는데, 집에서 나오다 접촉사고가 일어났어요. 만일 경찰이 오고 하면 저의 무면허 때문에 큰일 났을 텐데 상대가 그냥 저를 보내줬어요. 아주 새 차였는데. 지금도 감사하네요.


그리고 선물처럼 얻어진 감사..소통..성장하는 마음.. 

또 학교 갈 때 자기차로 저를 라이드 해주었던 동기 선생님도 생각나요. 감사했고요. 제가 워낙 유학이라는 애 셋과 생존이라는 무게 때문에 예민하고 누구랑 친해지고 할 여유가 없었는데 초기에 이 선생님의 차를 타고 다니며 마음을 많이 열게 된 기회가 되었어요.

유학 준비할 때 저는 한국에서 준비를 심하게 많이 해갔어요. 여러 사람들에게 이메일만도 한 백통은 썼고, (세어보니 정확히 85 통이네요) 전기도 연결하고 집도 얻고 전화도 만들어가고, 그랬던 이유는 정말 애 셋 데리고 잇는 앞에서 이거 저거 실수하지 말아야지 했고 또 하나 제가 너무나 외국 생활에 초보라 겁이 잔뜩 나있던 거죠. 뭔가 잘 못 될까바요. 하지만 초기에 노트북 잃어버리고, 면허도 못 따고 하면서 느끼게 되었어요.

 

낯선 환경, 다른 문화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실수하고 내 맘대로 안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내 제일 약한 모습이 가장 싫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진짜 저는 제 가장 약하고 드러내기 싫은 실수가 가장 먼저 드러나더라고요 사실 노트북 이후에도 정말 전 많이 잃어버렸어요. 자동차 열쇠를 트렁크에 넣고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고, 차고에 집 열쇠를 넣고 잠가 버리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여행 가서는 택시에 핸드폰을 놓고 내리기도 하고요. 고생도 하고 나 자신이 싫지만 또 해결을 해야 하고 그러면서 나를 감싸 안고 살게 되고 한마디로 철드는 시간이었어요. 또 하나는 전 무슨 일을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고 제 판단으로 혼자 해결하는 스타일인데 미국 생활에서는 그게 전혀 안 먹힌 거죠. 그럴 수도 없고요.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 소통하고 부탁하면서 제가 느끼기엔 의존적, 신세 지는 사람이 돼야 했어요. 한 2년 지나니 알겠더라고요. 내가 그동안 참 독단적으로 살았구나. 스스로는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과 거리를 두고  혼자 잘난 척하면서 살았구나 느꼈어요. 사실 마흔에 떠난 유학 학위도 학위고 영어도 영어지만,


유학을 통해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세상은 넓고 참 내 맘대로 안된다 이고, 나라는 인간은 약하고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이런 나를 솔직히 인정하고 존중하며 세상과 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인간이 완벽할 수야 있나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유학 이후로 제가 좀 내려놓고 남과 어울리고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거죠. 마치 버블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처럼 제 안에 갇혀있던 제가 많았는데 초기 이 두 사건을 통해 완전히 그 버블이 펑 터지고 정말 납작 바닥에서 하루하루 무탈히 생존하는 것에 감사하는 삶을 보내게 되는 시작이 되었어요. 


누군가 2년 동안 남편도 없이 애 셋 데리고 키우며 미국에서 석사를 어떻게 땄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할꺼예요. 

 전 오늘만 살았어요.
아무리 내가 준비하고 애써도 내 맘대로 안되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그냥 오늘 아침 눈떠서 저녁 눈감을 때까지
오늘 해야하는 공부하고, 처리할 일 하고, 아이들과 한번 더 하늘보고 웃고,
내가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은 좋은 분들과 함께하는 감사와 소통으로 몰아내고, 
오늘만 집중해서 최고로 행복하고 최고로 몰입하며..
그런 오늘을 살다보니 귀국하는 날이 되었던 거예요. 

오늘 글이 좀 기네요.  사람이 누구나 한번 성장하고 철이 드는 시기가 있잖아요. 군입대, 대입 재수, 실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제게는 미국 생활이 그랬기에 그 시작이 되었던 사건을 좀 자세히 써봤습니다.

 

지금은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서울의 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영어도서관 관장도 했고, 대학, 중학교, 도서관 등에서 강의도 하고 브런치 글도 쓰고 잘 살고 있으니, 힘든 일이 있어도 이또한 지나가리라~ 하면 좋은 시간이 온다는 걸 또 한 번 몸으로 경험한 것 같네요. 

지금도 잊지 않는 건 "오늘을 산다.. " 바로 이거일 것 같아요. 생각없이 막 사는 건 아니지만 그냥 오늘을 사는 것. 한국을 떠날 때는 늘상 십년치 계획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터라 저는 사실 이건 저에게 놀라운 변화였죠.


어둡고 힘든 글을 쓰려는 건 아니였는데 본의 아니게 길어졌네요~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저의 다른 이야기들도 많이 사랑(?)해주세요~이상 선한영어 나누고픈 유니스였습니다.


https://brunch.co.kr/@niceunice/36

https://brunch.co.kr/@niceunice/35

https://www.youtube.com/watch?v=w2pPhgt4Ybk&t=87s


https://brunch.co.kr/@niceunic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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