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방을 강하게 틀어 집안이 훈훈했다. 곰 앞에 누인 F는 온기에 천천히 녹았다. 곰은 막 F의 뒤통수를 깨부쉈던 날처럼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V는 그들을 앞에 두고 엽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F에게 직접 두어 번 배우기도 했지만, 사냥을 그만두지 않았음을 들킨 그가 쭈뼛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총을 분해하는 모습을 짓궂게 지켜본 나날 덕에 크게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V는 손질한 엽총을 탄알 없이 장전하고서 허공을 겨눴다. 방아쇠를 당기자 사소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순간이 완성될 것이었다. V는 선반을 열었다. 소금과 설탕 따위가 담긴 병들이 있었다. 병들을 밀어내며 손을 뻗었다. 손에 쥐어져 나온 것은 탄알이 정렬된 종이 상자였다. 가까운 장소에 두는 편이 좋다고, 그래야 위험한 순간에 반응할 수 있다던 F의 말이 떠올랐다. 슬쩍 바라보면 버터 상자처럼 보이지 않느냐는 농담도 함께. 버터? 사슴과 멧돼지 따위가 그려진 상자를 바라보던 V는 웃어보려 애썼다.
그녀는 이대로 소형차를 몰아 K의 집으로 향한 뒤 창 너머로 그 집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넘쳐 외벽으로까지 새어 나오는 빛을 무참히 꺼뜨릴 생각이었다. 평화로이 오가는 K 부부의 모습을 가늠자로 쫓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면 총성과 창 깨지는 소리, 그리고 비명이 한데 어우러질 거였다. 그러나 V의 계획은 중단되었다. 어느새 곰이 F의 얼굴을 너무도 열심히 핥아대고 있던 것이다. 혓바닥이 내밀어질 때마다 커다란 아가리가 그의 얼굴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곰은 다가온 V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었다. V는 F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피부는 완벽히 녹은 상태였다. 다만 손에 닿은 것은 얼굴이라기보다는 축축이 젖은 이름 모를 물질에 가까웠다. 그럼 이 시신은 누구란 말인가?
책과 앨범, 편지 따위를 모아 F의 몸 위로 흩뿌렸다. 집에 남은 휴지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다. 그래도 남아도는 휴지는 두툼하게 뜯어 그의 몸에 가벼이 둘렀다. 휴지로 만든 미라가 된 그의 모습에서 다시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V는 거기에 식용유를 뿌렸는데, 벌떡 일어난 F가 새치로 가득한 머리에서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며 놀랐지? 하고 외칠 것 같은 예감이 붙잡힐 듯 붙잡히지 않고 아른거렸다. 그녀는 옷장에서 속옷과 외투를 구분하지 않고 꺼내와 미라가 된 F 주변으로 던졌다. 그의 옷과 그녀의 옷 전부 그렇게 했다. 침구류 역시 주변에 둘렀다. 역시 그의 것과 그녀의 것, 곰의 것까지 전부. 이제 바닥은 옷과 종이들로 난장판이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유아용 놀이방 바닥과 같은 푹신한 행복감이 느껴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곰이 마당으로 나가도록 손짓했다. 곰은 휴지로 만든 미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밖으로 나섰다. V는 베개 하나로 F의 얼굴을 덮은 다음, 거기에 총구를 들이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고서는 휴지에 불을 붙였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다.
화염과 연기로 가득해지는 평생의 보금자리를 바라보던 곰은 V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처럼 열심히. V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 역시 타들어 가는 집을 앞에 두고 피어나는 온갖 감정을 정신없이 바라보았으니까. 물을 붓고 눈을 끼얹다가 소방차를 부르고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V는 그제야 마당에서 뒹구는 곰을 보았다. 얼마나 열심히 뒹굴었는지 온 털에 눈이 들러붙은 채였다. 그녀는 곰의 엉덩이를 두드려 가며 소형차 쪽으로 향했다. 곰은 포기한 듯 V를 따랐다. 그녀는 뒷좌석 문을 열고 곰에게 손짓했다. 곰은 지시에 따라 몸을 들이밀었지만, 거기론 몸의 절반도 들어가지 않았다. 조수석이나 트렁크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아기곰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음에도 괜히 그래본 V였다. 그녀는 차를 두고 떠났다. 곰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집이 등지고 있던, 산과 이어진 숲길이었다. 손전등 불빛이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아 멀끔하게 쌓인 눈길을 비추었다. V는 눈을 다리로 밀다시피 하며 나아갔다. 때로 안쪽에 가려진 돌과 뿌리 등에 발이 걸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곰의 크고 단단한 몸을 한쪽 손으로 잡은 덕이었다.
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에 다다랐을 때, V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곰의 발자국과 눈 덮인 나무들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너머의 광경을 그려볼 수 있었다. 경찰과 이웃들이 한 가정의 불행을 구경하러 몰려들 것이었다. 누군가의 내면이 세상에 드러나는 게 어떤 식인지를 멋대로 짐작하면서. 물론 그녀는 세상에 내면이 드러날 수 있다면 이런 식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은 오히려 고요히 침잠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V는 다시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손전등의 빛으로 밝혀진 눈 덮인 산은 비스듬히 기운 거대한 벽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미리 챙겨둔 삶은 달걀을 꺼내 곰에게 내밀었다. 곰은 게으른 움직임으로 입을 벌려 V의 손가락까지 입술과 혀로 빨아가며 받아먹었다. V가 품에 넣어온 달걀은 곰은커녕 자신에게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는 우리뿐이야. 그녀가 말했다. 곰은 무심하게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