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산을 올랐다. 발이 제대로 빠지지 않을 땐 주변의 나무를 붙잡았다. 이 너머엔 무엇이 있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선명한 발자국은 뒤쫓기 좋을 것이었다. V는 가능한 한 멀리 나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산을 넘어가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가능하지도 않았다. 산 너머를 상상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굶어 죽거나 굶어가며 얼어 죽을 거였다. 그전에 붙잡힐 가능성이 컸다. 앞서 움직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의 걸음은 느렸다. 그녀는 곰이 자신의 느린 걸음걸이를 맞춰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발을 헛디딘 곰이 비탈을 껴안듯 납작 엎드려서는 계속 울어대는 모습을 본 뒤에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곰은 겨우 내려온 그녀가 엉덩이를 두드리고 밀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만 있다가 뒤늦게야 걸음을 내디뎠다.
저 멀리 아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손전등으로 비추어도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멀찌감치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는 있었다. 손전등의 빛 혹은 눈길에 남았을 발자국을 보고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곰은 계속해서 엉거주춤하게 걷다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이런 식이면 금방 따라잡힐 거였다. V는 품에서 달걀을 꺼내 곰에게 내밀었다. 혀를 내밀어 핥아먹는 듯하던 곰은 돌연 고개를 돌려 달걀을 떨어뜨렸다. 손길 자체는 거부하지 않아서 그녀가 목덜미를 쓰다듬는 동안 곰은 유순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곰의 뒤로 돌아간 V는 온 체중을 실어서 엉덩이를 밀었다. 이번에 곰은 순순히 움직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주저앉았다. 그렇게 완고한 엉덩이를 밀게 될 것임을 생각하지 못한 V는 도리어 자신이 밀려나고 말았다. 뒤로 기울어지던 V는 무엇이든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곰에게 닿았던 손은 털 몇 가닥만을 뽑는 데 그쳤고, 좌우로 솟은 나무에는 아슬아슬하게 멀어 닿지 않았다. 겨우 붙잡은 것은 엽총이었다. 그러나 나무에 걸쳐 세웠을 뿐인 엽총은 그녀를 전혀 지탱하지 못했다.
요란하지 않게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지나온 눈길을 굴렀다. 붙들 수 있을 듯한 것들이 계속 손아귀에 들어왔다가 얼른 빠져나갔다.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에 당하는 기분이었다. 정신없이 굴러떨어지는 그때, 느닷없는 행복감이 몰려오기도 했다. 이런 식이라면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의 사고와 착각은 데굴데굴 구른 V가 나무에 부딪히며 끝났다. 가지와 잎에 쌓였던 눈이 아래로 쏟아졌다. 얼굴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그녀는 눈을 떴다. 곰은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밭에서 뒹굴며 허공을 비추던 손전등을 집었다. 빛이 오르막에 주저앉아 아래를 바라보는 늙은 짐승을 비췄다. 금방이라도 감길 듯한 눈을 겨우 치켜뜬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쏘아진 빛 때문은 아니었다. 지친 곰은 온몸으로 무언가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V의 눈에, 곰은 눈 덮인 작고 통통한 나무로 서서히 변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단단히 뿌리를 내린. V는 눈이 말라붙을 때까지 그 나무를 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나무는 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어나려던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다리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통증에 주의하여 다시 몸을 일으켜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걸을 수가 없었다. 다리로 몸의 무게를 지탱하는 그 자체가 불가능했다.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몸이 점점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V는 나무에 기대고 앉았다. 가만히 손전등으로 곰을 비추던 그녀는 문득 곰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손전등의 빛을 비추었다. 그러자 곰이 우웅, 하고 울었다. V는 곰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빛에 휩싸인 채로 있었다. 눈이 부셔서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곰의 울음소리는 자장가처럼 얌전히 반복되었다. 점점 멍하니 그 울음소리를 듣던 V는, 아래에서 쏘아지는 빛 때문에 자신이 귀신 놀이를 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발자국을 따라 올라온 이들이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퍽 장난스런 상상이 이어졌다. 항상 그런 장난을 즐기던 F가 그녀 옆으로 나타났다. 그는 그녀에게 엽총을 쥐여주며 말했다.
−어떤 짐승이 당신에게 달려들지 모르니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 좋을 거야.
−집에서 나오지 않고 있으면 괜찮은 거 아니야?
−물론 문을 부술 정도로 용감하거나 똑똑한 놈들은 거의 없겠지. 하지만 갑자기 곰이 나타날 수도 있어.
−겁주기는. 곰이 뭐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와?
−이유야 많겠지…… 예를 들면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서라거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의자 다리를 일생의 숙적인 양 물어뜯고 있는 아기곰이 있었다.
−버려져서 데려왔다며?
−주변에 아무 흔적이고 뭐고 없었어. 나와 그 친구가 지릴 것 같은 오줌을 참으면서 둘러봤는데도 그랬지. 오줌 냄새를 맡고 쫓아오면 안 되잖아?
−그럼 곰이 무슨 수로 온다는 거야?
−우리는 안 지렸는데 쟤는 지렸거든.
−농담이지?
−농담 아니야.
−이럴 수가. 다시 놓고 오면 안 돼?
−나도 이제 무서운걸.
−웃기지 마. 이미 다음 약속까지 잡은 주제에.
−아무튼…… 허무맹랑한 위험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잘 배워둬. 총을 이렇게 잡고…… 이렇게…… 혼자서 가끔 연습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적당히 붙어. 나 그럴 기분 아니야.
−물론이지. 물론…… 무게중심은 앞으로 두고 말이야…… 무릎을 굽혀서…… 방아쇠는 단번에 당기는 게 아니라 천천히……
무기력하게 꾸벅이던 곰의 고개가 쳐들렸다. V는 그제야 방아쇠를 당겼음을 깨달았다. 어느 틈에 손전등은 다시 곰을 비추고 있었다. 곰은 V에게 등을 보이며 오르막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두어 걸음 나아가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지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계속 들썩거렸다. 두 다리로 벌떡 일어서는 게 곰의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그대로 균형을 잃은 곰은 뒤로 넘어지면서 눈길 아래로 굴렀다. 묵직하지만 느리게, 정확히 V가 굴러온 길 그대로였다.
그녀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리가 부러져서도 아니었고, 손이 떨려 제대로 총을 겨누지 못해서도 아니었고, 겁을 먹거나 가만히 얼어 버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탄알이 나아갔을 경로를 역으로 하여 굴러오는, 동시에 둘의 발자국까지 온몸으로 지우는 곰과 그녀 자신의 주위로 천사들이 반짝이는 눈꽃을 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V는 착란에 빠진 게 아니었다. 굴러온 곰 아래에 깔리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천사들과 눈꽃의 반짝임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마지막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마지막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이유였다.
V의 몸은 곰에게 깔려 으스러졌다. 총과 뼈와 마음이 구분 없이 분질러지는 소리를 냈다. 충분한 힘이 있었다면 곰을 밀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힘은 없다. V는 저항할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몸이 따뜻해졌다. 곰의 몸 어디선가에서 흐르는 피 때문이었다. 피는 멈추지 않고, 잠든 이의 입에서 흐르는 침과 같이 따뜻하고 멈춤 없는 움직임으로 그녀의 몸을 천천히 적셨다.
피로 얻은 온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피는 차갑게 식고 말라붙어가며 체온을 통째로 앗아갔다. 곰의 털을 움켜쥐던 손에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몸의 힘이 빠지면서 곰의 무게가 V의 뼈 곳곳을 더 부러뜨렸다. 욱. 그녀는 곰의 몸 아래서 그런 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뼈가 어딘가를 찌른 듯했다. 그녀의 몸은 내부에서부터 젖어가기 시작했다. 우득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얇은 종이 위로 물을 떨어뜨렸을 때처럼 온몸이 젖어가며 망가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