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의 곰(2)

by 박동현

T의 전화가 걸려온 건 다음 날 점심 즈음이었다. 그들의 직장은 폭설로 어쩔 수 없이 휴무를 결정하여 모든 직원에게 공지한 상태라고 했다. 기상예보를 보고 직원들끼리 돈을 걸었다던 T는, 내기에서 진 F가 연락을 피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특유의 흥분한 목소리는 사냥에서 돌아온 둘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얼마나 멋지게 사냥에 실패했는지 앞다퉈 떠들곤 했는데, 사냥을 거북하게 여기는 그녀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한 F의 수작이었다. 그녀는 T의 차량 트렁크에 죽은 짐승들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가끔은 F의 차에도. 나중에야 그는 곰에게 피 냄새를 맡지 않도록 했을 뿐이라며 제 발 저린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었지…… V는 그이가 원래 덜렁대지 않았느냐며, 돌아오면 연락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육중한 제설차가 지나갔다. 청소부들은 느릿느릿 뒤를 따르며 도로 가장자리로 밀려난 눈을 정리했다. 거대한 바퀴 자국과 함께 도로가 드러났다. 각 가정은 가족끼리 힘을 모아 마당에 쌓인 눈을 치웠다. 눈은 창고에서 가져온 도구들이 아니라, 서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로 치워진 듯했다. 그런 차근차근한 움직임이 마당을 드러냈고, 도로와 연결된 길을 만들어냈다. 때때로 보초 역할을 부여받은 동글동글 눈사람이 나타나기도 하면서.


저만치의 광경을 바라보던 V는 조바심 속에서 홀로 쓸고, 푸고, 밀었다. F 없이 마당을 치우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아주 먼 시간 전에는 그랬겠지. 이제는 세상을 떠난 그녀의 부모와 말이다. 잘못된 표현임이 분명했지만, 평생을 F와 지냈다는 V의 인식이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소진된 젊음을 서로에게서 영원히 뒤적거릴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도로까지 이어지는 길을 겨우 튼 V는 삽을 눈밭에 꽂았다. 허리와 어깨가 끊어지려 했다. 거길 제외한 마당 곳곳은 여전히 눈으로 덮인 채였다. 허리까지 쌓인 눈은 세상을 하얗게 마비시켰다. 제설차로 길이 열렸다고 곧바로 차가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에 파묻혀 있던 F의 SUV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즐겼던 카섹스. 둘의 움직임과 함께 흔들리던 공간감, 끝없는 구석으로 몰렸다는 착각에 휩싸였다가 차분히 되돌아오는 현실감의 낙차, 나눌 수 있던 작은 세계. 별다른 이유 없이 그만둔 그것은, 걸핏하면 물고 매달리는 아기곰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다시 시작한 행위였다. 곰이 잠든 밤, 살금살금 도망쳐 나온 그들은 차에서 정적을 만끽하다가 점점이 들려오는 소리에 몰두하면서 서로를 끌어당겼다. V는 수없이 흘리고 닦았던 체액을 떠올리며 뒷좌석 문을 열어 가죽 시트를 어루만졌다. 차갑게 식은 살결이었다.


그날 밤, 체인도 감지 않은 SUV의 바퀴가 눈 위에서 자주 헛돌았다. 서행하는 와중에도 차는 도로 한가운데서 큰 원을 그리며 미끄러졌다. V는 F와 서로 찰싹찰싹 때리면서 포복절도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동차도 함께 들썩이며 웃을 것 같았다. 그녀는 도로 옆 비탈 아래에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물살이 세진 않았지만 깊이 탓에 주의 푯말이 있는 강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거기서 낚시와 캠핑, 심지어 수영까지 즐겼지만. 그녀는 비탈 쪽으로 운전대를 급하게 틀었다. 다시 바퀴가 헛돌았다. 비탈에서 통제력을 잃은 차를 움직이는 것은 관성뿐이었다. 한번 크게 들썩인 차는 운전석 쪽으로 기울었다. 차내에 수납된 물건들이 V에게로 쏟아졌다. 그대로 비탈 아래로 미끄러지며 한 바퀴 구른 차는 용케 멀쩡한 상태로 섰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곳곳에 눈 묻은 창 너머로 강가가 펼쳐져 있었다. 창을 내리자 물 흐르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이 모든 게 가벼운 농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듯한 평화로운 소리였다. V는 안전벨트를 풀고 옷을 벗었다. 속옷과 신발까지 전부. 완벽한 알몸이 된 V는 외투에 얼추 감싼 옷가지를 창밖으로 던졌다. 바로 페달을 밟으려던 V는 운전석에 기대앉아서는 눈을 감고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갑작스러운 정지에는 비논리적인 설득력이 있었다.


열린 창으로 넘어온 추위가 견딜 수 없이 무거워졌다.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차에 타고 있음을 확인하고서는 등받이를 세웠다. 페달을 밟았다.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강으로, 강으로……


SUV는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열어 두었던 창을 통해 빠져나온 V는 젖은 몸을 떨었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F와 연결되었다는 착각을 선사하는 추위였다. 속옷으로 물기를 대강 털어낸 그녀는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겹겹이 감싼 옷에 남은 미약한 온기가 몸을 안았다. 차가 지나가거나 굴렀던 쪽의 눈은 눌리거나 밀려 발목 정도 높이밖에 안 되었다. 덕분에 눈비탈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도로에 선 그녀는 집까지 뛰었다. 내리깔린 어둠은 두렵지 않았다. 이십 분이었나? 삼십 분? 그 정도 떠들며 F와 오갔던 산책로였다.


도착한 그녀는 뒷마당 쪽으로 향했다. 계속 달린 덕에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 낮 동안 마당을 치우며 쌓았던 눈더미가 보였다. 거길 삽으로 조심스레 파냈다. 머지않아 삽 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손으로 쓸어내듯 눈을 걷어내자 F의 얼굴이 드러났다. V는 피부의 긴장이 묘하게 무너진 그의 시체 앞에서 기도했다. 누구를 향한 기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먼지 가득한 침대 아래에 숨어 다가오는 발걸음을 바라보는 과정과 같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완전한 은폐가 아닌 잠깐의 유예. 기도를 마친 그녀는 다시 F의 위로 눈을 덮었다.


소파에 앉아 몸을 녹이는 V에게 곰이 느린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평소보다 살가운 움직임으로 얼굴을 비볐다. 밤에 홀로 남겨져 당황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사탕에 들러붙은 개미 떼처럼 모인 천사들이 좌우로 펼친 날개로 그녀를 품었다. 모두가 곁에 있었다. 밖에서는 F가 눈의 참호 속에서, 안에서는 곰이, 그녀를 지켰다. 하얀 깃털이 너풀너풀 떨어지며 발치로 소복이 쌓였다. V는 전부를 지니고 또 잃어버린 채로 온기 속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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