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비 오는 길
길 위에 비가 억수 쏟아부었다.
나는 저주라고 생각했다.
고통이라고 생각하며 따지기 시작했다.
뭡니까. 금쪽같은 시간을 냈는데
뭡니까. 하구 많은 시간에
뭡니까. 뭡니까. 도대체 왜 이러시나요.
난 시간이 아까 와서 돈이 아까 와서
그냥 비를 맞고 걸었다.
삼 킬로쯤 가서 강한 비는 약한 비로 바뀌고
안개로 보이지 않던 길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는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파도를 내고
날아가던 새들은 모여 바다 돌 위에 서 있다.
하늘과 바다가 내는 앙상블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피사체 위에 물방울이 맺혔다.
작품이 되었다. 그림이 되었다.
내가 원하던 사진이 되었다.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왔다.
나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걷는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걷다 보면 보여지는 것들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아는 것들
그것이 내가 평생 원했던 것 이었음을
그것이 내가 평생 꿈꿔 왔던 것임을
그때야 비로써 나는 신(神)께 감사했다.
(2025. 8. 11)
2025년 8월 12일 화요일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비예보가 있지만 어제보다는 덜한 편입니다. 간간히 약비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출발지로의 이동은 어제와는 다르게 제주시 방향이 아닌 서귀포시 방향을 향해 갑니다. 5코스부터는 출발점이 서귀포시 쪽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생겼네요. 아침에 모자를 한참 찾았는데 못 찾고 그냥 나왔습니다. 아마 어제 집으로 오는 버스에 그냥 두고 내렸나 봅니다. 늙어가나 봅니다. 자꾸 물건을 잃어버립니다.
06시 50분, 40분을 기다려서 서귀포 방면 202번 버스를 탔습니다. 화순환승센터에서 하차해서, 500번 버스를 타고 남원을 향해 달려갑니다. 버스는 08시 58분에 도착했고, 정확히 09시 05분, 올레 5코스를 시작합니다.
길은 남원 해안을 따라 쭉 이어집니다.
비가 오기 시작하네요. 우의를 꺼내 입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해안도로를 따라 걷습니다. 5코스에서만 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립니다. 숲길을 통과해서 해안 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한반도 지형의 포토 존을 통과합니다. 마침, 작품사진을 찍고 계신 포토그래퍼의 도움으로 예술작품 하나를 건집니다.
이 포토 존은 남원큰엉해안산책로(금호리조트 산책로)에 있습니다.
해안 암벽 길은 조금 위험합니다. 올레 길 찾기 애플리케이션에서 길을 이탈했다는 메시지를 듣고 찾은 길인데 바위가 가파르고, 돌이 미끄럽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순례자나 여행객들은 우회하기를 추천드립니다. '좋은 풍경에 넋이 빠졌다가는 올레 길을 포기하는 사고가 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암절벽에 파도소리와 벗하다 보면 세상일을 잊게 만드는 절묘한 길입니다. (3km 부근)
길은 남원큰엉해변에서 용천수가 솟아난다는 '신그물·태웃개'를 지나 위미마을로 이어집니다. 위미마을은 장애인도 갈 수 있다는 표시가 되어 있을 만큼 순탄한 길입니다. 또한 동백나무 군락지이기도 합니다.
17살에 시집온 현맹춘(1858~1933) 할머니는 어렵게 마련한 황무지 땅에 모진 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의 동백씨앗 한 섬을 따다가 심었고, 여기 기름지고 울창한 숲을 일구었습니다. 위미 동백나무군락지에는 100년이 넘는 동백나무가 1,000여 그루 자생하고 있어 봄이면 장관을 이룬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작은 수고가 큰 숲을 만들었고, 도민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동백마을은 금방 바닷가 해안마을로 바꿔집니다. 제주 마을들은 그래서 푸른 숲과 바다를 함께 품고 있다는 말이 이제 이해가 됩니다. 마을을 돌며 담쟁이가 에워싼 집터를 사진에 담습니다. 도종환의 詩 <담쟁이>가 떠올려집니다.
11시 57분, 7.7km 부근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심하게 쏟아붓습니다. 조금도 앞으로 나갈 수 없네요. 낯선 지붕아래 피신해 있습니다. 소나기가 그치기를... 비가 좀 잦아들었습니다. 다시 길을 나섭니다.
위미마을을 지나 넙빌레를 통과해서 공천포로 향해 갑니다.
넙빌레는 제주어로 '넓은 빌레' 즉 ‘넓은 바위’라는 뜻으로, 이곳은 바닥에서 물이 솟구치는 용천수가 풍부하게 솟아 지역주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합니다. 여자는 동쪽, 남자는 서쪽에서 노천 욕을 즐겼습니다. (9.5km 부근)
시작점에서 10.2km 부근, 제법 사람들이 붐비는 공천포식당에서 오늘 첫 끼니를 채웁니다. ‘전복물회’가 시그니쳐 메뉴라네요. 특이한 비주얼입니다.
와우! 최고의 맛입니다. 사람이 붐비는 이유가 있었군요. 시큼하지만 지나치지 않는 식감에 부드러운 전복의 풍미가 입안을 즐겁게 합니다. 저는 말아먹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오늘은 반 남은 밥을 말아먹습니다. 제주서 먹은 물회 중 단연코 최고입니다. 공천포 인근 마을은 무엇인가 심 쿵한 느낌이 들게 합니다. 식당 옆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테이크아웃으로 시켜놓고, 쌓인 책들을 스캔합니다. 시, 산문형식의 제주전설과 바다 그리고 인생의 통찰들로 가득 찬 책들이 보입니다. 일본 에세이가 특히 마음에 다가오고, 동년배 제주시인의 시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박현솔이란 시인의 <해바라기 신화>라는 시집에서 제가 쓰고 싶은 글들의 테마를 봅니다. 제주의 방언과 전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발등의 먼지를 털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대략 2km 정도 남았습니다. 길은 공천포 -> 신례천 -> 망장포에 이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점은 1.9km 망장포 앞입니다.
14시 30분, 출발한 지 5시간 26분 만에 종점인 쇠소깍에 도착했습니다. 올레 5코스는 13km 짧은 코스라 쉽게 걷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해안의 현무암 암벽이 힘들었고, 꾸불꾸불 골목을 돌며 체력이 바닥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귀포해안의 기암절벽, 한반도지형의 포토 존, 공천포 마을의 심 쿵한 분위기와 맛있는 전복물회가 도보자의 지친 심신을 달래 주었습니다. 특히 5년 전 그와 걷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어떤 구간에서는 나누던 대화도 생각났습니다. 올레 5코스는 트래킹이 아니어도 ‘가족들과 식사나 차를 마시며 바다를 보고, 오래 머물러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답고 낭만 가득한 남원~쇠소깍 올레 5코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