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화 「뮤리얼의 웨딩」 (Muriel's Wedding 호주, 1995)은 뚱뚱하고 못생긴 뮤리얼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유쾌한 영화다. 주인공 뮤리얼은 1990년대라는 시대에 맞지 않게 스웨덴 그룹 아바(ABBA)를 좋아한다. 매일 아바 노래를 듣고 아바 멤버들의 사진으로 방을 도배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뚱뚱한 외모뿐만 아니라 한물간 가수를 좋아하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뮤리얼만큼 박해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옛날 가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최애 가수를 숨긴 적은 많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과 함께일 때는 공감을 끌어내지만, 동년배들과 있을 때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취향 참 지루하네’하는 듯한 그들의 표정을 본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바로 ‘조용필’이다.
중학교 때 친구들은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등 댄스 가수에 빠졌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 반 아이들은 국내 가수는 ‘신승훈’, ‘이승환’에, 해외 가수는 ‘뉴키즈 온 더 블록’에 열광했다. 나는 그 가수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6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언니 오빠의 영향을 받았고 우리 형제가 모두 좋아한 가수는 조용필이었다. 친구들의 기호가 바뀌어 가도 우리 집 전축에서는 늘 조용필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속리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문장대에 오르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니 전국에서 몰려온 수학여행 학생들로 주차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도 땡볕 아래 주차장 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산에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학년 주임 선생님이 나보고 노래 한 곡 해보라며 들고 있던 메가폰을 주는 게 아닌가. 잠시 망설였지만,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내가 부른 곡은 조용필의 ‘단발머리’였다. 그 곡은 기다림에 지친 친구들에게 생기를 주고자 선택한 배려의 결과였다. 그러나 현장 반응은 선생님들만 신이 나셨고 우르르 몰려든 다른 학교와 우리 학교 학생들은 시큰둥해하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학생 시절 큰오빠는 일요일이면 전축으로 조용필 LP를 틀곤 했다. 특히 오빠는 그의 8집을 좋아했다. 수록곡에는 우리 집 장남뿐만 아니라 북한의 김정일도 좋아했다는 ‘허공’, 이 곡 덕분에 조용필이 탄자니아에서 훈장을 받은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 겨울의 찻집’이 있다. 몇 년 뒤 고3 시절 새벽 독서실에서 귀가하던 길이었다. 새벽 안개가 스산하게 피어오르는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 마이마이에서 흐르던 곡이 바로 ‘그 겨울의 찻집’이었다. 맘처럼 되지 않는 현실에 지친 나를 위로한 것은 조용필의 애끓는 목소리였다.
드디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전화 응대도 기안 작성도 엉망진창이었던 나는 구박과 자책의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식 후 노래방에서 조용필의 ‘상처’를 불렀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조용필을 좋아하는 상무님은 회식 이후 내게 쏟아붓던 핍박을 거두고 친절과 관용을 내리셨다.
며칠 뒤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상무님의 호출을 받고 긴장하며 쪼르르 달려갔다.
“부르셨어요?”
“미스 김, 이따가 노래 준비를 좀 해. 상품이 빵빵한 라디오 전화 노래자랑이 있거든? 거기 신청해놨으니까 준비하고 있어.”
“네에?”
상무님은 유명한 라디오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전화해서 나를 등록시켰던 것이다. 이 소식은 여직원들을 흥분시켰고 곧 사무실은 노래자랑 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사장님이 오전 결재만 끝내고 떠난 터라 텅 빈 사장실에서 업무는 잊은 채 노래 연습에만 집중했다. 결전의 노래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었다. 프로그램 작가의 전화가 왔다. 그녀는 노래할 때는 수화기를 마이크처럼 잡고 조용한 곳에서 부르라고 당부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결과는 ‘땡’이었다. 패인敗因은 남자 노래를 선택한 것이었다. 여자가 부르기에는 너무 낮은 키로 염불하듯 시작해서 클라이맥스 고음에서도 시원하게 찌르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상은 못 받았지만, 그날 사장실 유리문 앞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여직원들과 상무님의 눈빛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그 시절 퇴근 후 부산 영주동 삼육외국어학원을 다녔다. 그곳에서 만나 친자매와 같은 정을 나눴던 숙이 언니가 결혼 후 저 멀리 거제도로 떠나게 되었다. 언니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사실 그 선물 생각만 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20대 철없던 나는 한 달 동안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5절지 크기의 시화로 그린 다음 액자에 넣어 언니에게 선물했다. 뿔테 안경을 낀 조용필 얼굴을 크게 수채화로 그리고 그 위에 가사를 검은색 물감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숙이 언니는 조용필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언니가 가사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지 않기 위해 거제도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운명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런데 그도 조용필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