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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남 Dec 01. 2021

21.선비들이 탐냈던 사물 (1)벼루

-벼루야! 벼루야!

옛 선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는 ‘문방사우’였다. 1780년 6월 15일에 쓴 유만주의 일기 <흠영>의 일부분을 보면, 의식주나 생활도구에 사치를 부리면 폐단이 생기지만 문방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쯤은 괜찮지 않느냐고 넌지시 되묻고 있다.     

위원화초석(渭原花草石) 운룡고사행차도일월연(雲龍高士行車圖日月硯)


저택에 사치를 부리면 귀신이 엿보고, 먹고 마시는 데 사치를 부리면 신체에 해를 끼치며, 그릇이나 의복에 사치를 부리면 고아한 품위를 망가뜨린다. 오로지 문방도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만은 호사를 부리면 부릴수록 고아하다. 귀신도 너그러이 눈감아 줄 일이요, 신체도 편안하고 깨끗하다.


18세기 문인들의 벼루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벼루는 소모성이 있는 붓, 종이와 달리 반영구적으로 쓰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적인 조각품이자 아름다운 공예품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녀왔다. 풍류를 즐기던 우리 옛 선인들은 벼루에 아름다운 조각을 넣어 한껏 멋을 내고 벼루를 얻으면 그에 대한 애정을 ‘명銘’이라는 문체의 글로 표현했다. 이른바 '연명硯銘'이다. 그래서 벼루 뒷면에 명문장가와 명필이 모여 연명을 새겨 넣고 벼루 자체에 이름을 붙여주며 감상하고 즐겼다 한다.      


벼루광인 유득공은 우리 벼루의 역사를 정리해서 한 권의 책 《동연보》라는 책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비싼 값을 주고 사온 벼루 '적간관연'을 이서구의 사촌동생 이정구에게서 빼앗고 대신 장시를 지어준 일이 있다. 그는 시에서 '미불은 옷소매에 벼루 숨겨 훔친 일 있고/ 소동파는 벼루에 침을 뱉어 가진 일 있지/ 옛사람도 그리했거늘 나야 말해 무엇하랴'라고 써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중 <이운지> 그 가운데 있는 ‘문방아제’ 편에는 시전지를 비롯해서 온갖 문방구를 소개하고 있다. 서유구는 특히 벼루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벼루 보는 법, 한국과 일본과 중국의 명품 벼루, 다양한 재질의 벼루 소개, 벼루의 양식과 벼루 보관법, 그리고 벼루와 함께 쓰이는 연적, 연갑 같은 소품까지 안내하고 있다.     


굳다고 말하지 말라/ 갈면 뚫리나니/ 학문에 뜻을 두라/ 어찌 그리하지 않는가

(勿謂堅 磨則穿 志於學 奚不然)     


이용휴의 아들 이가환(李家煥)이 벼루에 새긴 글에는 공부에 임하는 선비의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다. 아무리 벼루가 단단해도 갈고 갈면 뚫어지고 학문도 깊이 파고들면 언젠가는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방구 하나에도 자기 삶의 완성을 추구하는 선비정신이 빛나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애착 때문에 그 선비가 죽으면 부장품으로 벼루를 함께 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최근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근배 시인의 등단 6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반평생 수집한 한국 옛 벼루를 공개하는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 전시가 가나아트센터에서 있었다. 이 시인은 벼루 애호가로 유명하다. 소장 벼루만 1000점 이상이고, 벼루에 관해 쓴 연작시만 80여 편에 이른다. 이번 전시가 한국 벼루의 진면목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이근배 시인. 그의 시 한 편을 감상해보면, 그의 별명이 왜 ‘연벽묵치(硯癖墨癡·벼루에 미치고 먹에 바보가 된다)’인지, 그가 얼마나 벼루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추사秋史의 벼루를 보았다

댓잎인가 고사리 잎인가/ 화석무늬가 들어 있는

어른 손바닥만한 남포 오석/ 돋보기로 들여다보아야

—다듬고 갈아 군자의 보배로다 琢而磨只/ 君子寶只 등

깨알 같은 48자 명문銘文이 새겨 있는/ 추사가 먹을 갈아 시문을 짓고

행예行隸를 쓰던 유품이 아니라면/ 한눈에 들어올 것이 없는

그 돌덩이가 내 눈을 얼리고/ 내 숨을 멎게 한다

어느새 나는 쇠망치로도 깨지 못할/ 유리장을 부수고 벼루를 슬쩍?

그랬으면 오죽 좋으련만/ 못나게도 내 안의 도둑은 오금이 저린다

박물관을 나서는데/ —게 섰거라!

그 작고 검은 돌덩이가 와락/ 내 뒤통수를 후려친다.

                                이근배  ‘추사를 훔치다 —벼루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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