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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Mar 17. 2020

인생 첫 심폐소생술

살 사람은 산다

3월 내과 밤 근무 때의 일이다. 밤 근무는 오후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일하는데, 밤에는 일이 좀 적으므로 낮보다 절반의 인원만 근무하여 한 사람당 맡는 병동이 2배로 넓어지는 시스템이다. 레지던트도 당직 근무로 전환하여 낮보다 훨씬 적은 인원만 병원을 지키게 된다(듣기로는 레지던트 3명이서 500명 이상의 환자를 보는 셈이라 했다). 환자들 상태가 낮만큼만 유지되면 수월하게(?) 밤을 넘길 수 있는 인력이지만, 상태가 안 좋아져 중환이 되거나, 심정지 환자가 발생하게 되면 사람이 매우 부족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밤만 되면 꼭 안 좋아지는 환자가 있다. 어떤 때는 동시에 여러 명이 안 좋아지기도 하는데, 그런 날은 지옥이다.


그 날은 안 좋은 환자는 1명이었지만, 저녁부터 아침까지 점점 악화되는 모습으로 근무 내내 나를 힘들게 한 환자가 있었다. 류마티스 내과 환자였는데, 류마티스 내과의 특징이 입원 환자가 거의 없고, 있어도 대부분 상태가 괜찮아서 안 좋아질 이유가 별로 없다. 환자는 처음에 숨이 찬다고 호소하여 가서 봤는데, 호흡이 분당 30회 정도로(정상은 12~20회) 빨라져 있었다. 피검사와 가슴 엑스선 검사를 했는데 정상이었다. 산소포화도 역시 정상으로 나오는데, 이상하게 호흡 속도만 빨라져 있었다. 뭔가 찝찝했지만 류마티스 내과에, 나이도 40대로 젊고, 본인도 숨찬 거 외에 다른 힘든 건 없다고 하여 우선 지켜보기로 하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왜 안 좋아졌는지 이유를 모른다.


첫 호소 이후 두 시간쯤 지났을까, 호흡이 분당 40회 정도로 더 빨라지면서 산소포화도가 90%로(정상은 95% 이상) 떨어졌다는 전화가 왔다. 환자 본인은 크게 달라진 것은 못 느낀다고 하였지만, 당직 1년차 레지던트한테 노티(환자 상태를 보고하는 행위)를 하였다. 레지던트도 이유를 모르겠던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다. 산소도 주고, 가래약도 주고, 호흡기 치료도 했는데 전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어, 몇 시간 뒤에는 호흡수가 분당 60회까지 오르고, 산소 치료도 높은 강도로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새벽 5시쯤 결국 일이 터졌다.


환자가 처음 숨참을 호소하고 8시간쯤 지난 시각, 환자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심정지는 아니었고, 호흡이 빠른 거 외에 혈압, 체온 등의 바이탈 사인은 정상이었다. 레지던트는 급하게 머리 CT를 찍어보자고 하였다. 분주히 준비해서 보조원과 함께 침대를 끌고 1층 촬영실에 다녀왔는데, 돌아올 때까지 환자 상태의 변화는 없었다. 다녀오고 나니 새벽 6시가 조금 넘어 회진 준비 등으로 병동이 분주하고, 나도 7시 퇴근이니 얼른 남은 일들을 정리해야 했다. 보조원과 급히 침대를 병실에 집어넣었는데 침대가 저절로 튕겨져 나왔다.


침대와 벽 사이를 보니 바닥에 둥근 쓰레기통이 넘어져 있었고 쓰레기통의 탄성이 침대를 튕긴 듯했다. 원래 침상마다 하나씩 비치된 쓰레기통이라 '침대 꺼낼 때 넘어졌나 보다' 하고 환자 머리 쪽으로 이동하여 쓰레기통을 세웠다. 머리 쪽에 간 김에 마지막으로 환자를 확인했는데, 뭔가 너무 조용했다. 1초에 한 번씩 요란하게 숨을 쉬던 환자가 전혀 숨을 안 쉬고 있었던 거다. 급히 맥박을 확인해 맥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쳐 간호사를 불러 '코드 블루'를 띄웠다. 코드 블루는 원내 심정지 환자 발생을 알리는 방송으로, 병원 전체의 해당 과 인턴과 레지던트가 달려온다. 코드 블루를 띄우고 즉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방송을 들은 간호사와 보조원이 달려와서 침대를 처치실로 이동했다. 나는 침대 옆에 붙어 이동하면서 심폐소생술을 계속했다. 침대 바퀴에 발이 두 번 깔렸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흉부 압박을 계속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침대 위에 올라타서 소생술을 하며 이동하는 게 정석이었다. 금방 다른 의사들이 달려와서 심폐소생술을 이어받았고, 바로 다음 차례에서 심장 박동이 돌아왔다. 발견 후 5분 만에 소생에 성공한 것이다. 환자는 이후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몇 주 뒤 결국 살아서 퇴원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그 환자를 살린 건 내가 아닌 그 넘어진 쓰레기통인 거 같다. 그 쓰레기통에 침대가 튕겨 나왔기 때문에 환자 머리 쪽으로 내가 이동하게 되었고, 심정지 상황을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환자를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조금 더 늦게 발견했을 것이고, 시간이 흐른 만큼 소생 가능성은 낮아졌을 것이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사는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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