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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Sep 19. 2024

껌만큼의 죄책감

우리 모두의 무관심

벌써 며칠 째, 아파트 공동현관 월패드 옆에 씹던 껌 하나가 붙어 있었다. 바닥도 아니고 벽 하단부도 아니고 사람들의 눈과 손이 자주 가는 곳에 떡하니 붙여 놓다니. 못 배운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내가 뗄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 채 무시하고 들어간 게 첫 만남이었다. 껌을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있으면 안 될 곳에 당당히 붙어 있는 자태가 제법 흥미로웠다. 이런 생각을 한 작자는 대체 누구일까, 아이일까 어른일까. 붙이면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번 마음이 동한 이후로는, 공동현관을 지날 때마다 그 껌을 유심히 지켜봤다. 처음엔 수분기를 머금고 촉촉하면서도 깨끗한 미색을 띠던 껌은 시간이 지날수록 딱딱한 어두운 빛깔로 변했다. 5일쯤 되던 날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껌을 붙인 사람이 어른이라면, 다른 누군가 대신 떼준 걸 봤을 때 더 부끄러울까, 아니면 아직까지 붙어 있다는 게 더 부끄러울까. 오랫동안 붙어 있는 걸 보고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느꼈을까. 느낀다 한들 딱 껌만큼의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마음이 들긴 할까. 그 사람의 속내가 정말 궁금해졌다.

한 일주일쯤 되었을 때, 껌은 여기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한동안 망상을 했나 싶을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이상한 생각이지만 약간 아쉽기도 했다. 구경거리가 사라졌네. 뗀 사람은 또 누구일까, 당사자일까 청소원일까 다른 선량한 입주민일까.

일단 이 같은 황당한 상황을 연출한 인성으로 보아 당사자의 자체 처리는 꿈도 못 꿀 것 같고. 아마 청소원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해 청소원이 뗐을 거라는 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선량한 입주민이라고 추측하기엔 생각해 볼거리가 많다. 입주민들의 대다수는 이 장면을 보고 분명 불편해했을 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처럼 '방치하기'를 선택했다. 타인의 몰지각한 결과물을 치우려면 품이 꽤 들기 때문이다.

우선 우연히라도 휴지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침이 묻은 무언가에 접촉해 잡아당겨야 하며, 또 그 쓰레기를 아늑한 집에까지 들고 와야 한다. 이만큼의 선의를 가진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 간은 없었다. 껌이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껌을 붙인 사람과 우리 입주민 모두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모두들 청결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조금씩 침해받으면서도 문제를 방기 했다. 그러니 딱딱하고 검게 변하는 껌을 보며 현관을 지나쳤을 수많은 사람 중에, 과연 참고 참다가 휴지를 들고 나올 의인이 있겠냐는 거다. 혹여 그간 출장이나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입주민이 발견하자마자 뗐을 수도 있지만, 왠지 가능성이 더 희박해 보인다.

씹던 껌, 당신은 붙어 있는 껌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나요, 부끄러움을 느꼈나요, 아니면 비실비실 웃음이 났나요, 그도 아니면 아무런 느낌이 없었나요? 자, 이제 정말 누군가 껌을 뗐군요.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드나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어 후련한가요, 내 껌을 만졌을 누군가에게 미안함이 드나요? 또 아무런 생각이 없나요?

입주민들은 어떤가요? 아마 후련하겠죠, 여기에 따라붙은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내 무관심함에 부끄러웠나요, 치워준 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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