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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Aug 23. 2023

그 어둡고 외로운 길에서 도망쳐요

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반복해서 들어야 좋은 노래가 있는가 하면, 첫 소절만 들어도 ‘필’이 딱 꽂히는 노래도 있습니다. 노래가 좋아지는 계기는 각기 달라요. 예를 들어 이소라의 노래들은 대개 노랫말에 집중하고, 김광진의 노래는 전체적인 곡 구성을 살펴보게 되죠. 오소영의 노래들은 음색과 노랫말을 모두 듣게 돼요. 기본적으로 제 귀에 척 달라붙는 목소리를 지닌 데다 노랫말을 만드는 솜씨가 아주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죠. 요즘은 공연장 자체를 안 가고 있지만, 한참 다닐 때는 그의 공연을 보러 서울 곳곳의 작은 공연장을 찾아다녔어요. 봉천동의 작은 와인바, 문래예술촌의 이색적인 공연장도 모두 오소영의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간 곳들이죠. 오소영의 노래는 1집의 ‘기억상실’이 제일 유명해요.      


내가 누구냐고? 나도 몰라/그런 게 어딨냐고? 이럴 수도 있지/왜 비틀거리냐고? 배가 너무 고파/왜 굶고 있냐고? 돈이 없으니까/아무리 걸어도 보이는 것이 없어/난 이렇게 배고프고 더러운데/쉴 곳이 필요해 어디로 가야 할까/도대체 내가 있는 여기는/어딘 거야 어딘 거야 어딘 거야 도대체 여긴/어딘 거야 어딘 거야 어딘 거야 도대체 여긴     


오소영 씨가 TV 프로그램을 보고 착안해 만들었다는 이 곡은 담담한 목소리로 툭 내던지듯 자문자답하는 노랫말이 인상적이에요. 당시 저는 ‘난 이렇게 배고프고 더러운데’라는 노랫말에 꽂혀 있었어요. 스스로의 처지나 상황을 더럽다는 표현력에 놀랐고, 무엇보다 그 단어가 이 전체 노랫말에 잘 어울려서 감탄했어요. 화자는 기억을 잃은 상태입니다. 제자리에서 쉴 수도, 어딘가로 가기도 어려운 상황으로 보여요. 사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거겠죠. 최승자 시인은 시 ‘삼십세’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가 말하듯,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의 당혹감이 노랫말에서도 느껴졌어요. 저는 이 노래를 2003년경에 접했는데요,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던 시기였죠. 대체 뭘 해야 하나, 멈출 수도 없고 돌아갈 길은 멀고. 당시 제 마음을 알아주는 듯해서 각별하게 아꼈던 곡이에요.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오소영 씨의 노래는 따로 있습니다. 오소영 씨 3집은 2020년에 발매됐고 거기에는 ‘어디로 가나요’라는 노래가 있어요. 앨범 발매 전부터 공연을 통해 익히 들어왔던 곡이에요. 그는 봉천동 와인바 공연장에서도, 문래예술촌의 작은 공연장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죠. 3집에 넣을 곡이라고 하면서 기타 한 대로 연주해 들려주던 곡.      


하얀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깜박이는 커서를 노려보는/너는 뭘 쓸지 잊어버린 소설가/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총 속에 탄환은 줄어가는데/너는 뭘 쫓는지 모르는 사냥꾼/그대여 어디로 가나요/그대여 갈 곳은 있나요/그대여 이제 그만/그 어둡고 외로운 길에서/도망쳐요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반했어요. ‘아, 이건 내 노래구나’라고 느꼈죠. 특히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는 너는 뭐 쓸지 잊어버린 소설가’라는 부분에서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했습니다. 내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대신 누군가 선율과 리듬을 입혀 노래로 들려주는 느낌이었어요. 이 노래에서도 오소영은 여전히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네요. 1집에서는 기억상실 때문이었다면, 3집에서는 무엇 때문일까요? 기억상실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기억보다 마음을 상실한 사람의 허탈함이 진하게 느껴졌죠. 2절에는 ‘너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모험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제 상황이 딱 그랬어요.     


‘분명 나는 책이 좋아서, 글자를 사랑해서 에디터라는 일을 선택했는데….’ 남의 글을 만지고,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인 걸까요.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버티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노래를 듣고 공연을 보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노래가 오소영의 ‘어디로 가나요’였습니다. 노래에서 화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꿈들이 멈춰버린 길에서 도망쳐요’ 이 마지막 구절을 들으며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릅니다. 조동익 씨의 노래 ‘탈출‘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어요.      


전쟁 같은 그대 일상 속에서/한 걸음만 물러설 수 있다면/배낭 속에 칫솔과 치약/대충 대충 짐을 꾸릴 수 있다면/그댄 성공할 거야/모두 두려워하는/짜릿한 탈출에/아침 일찍 그댄 일어나야 해/모든 사람에게 상냥해야 해/숨통이 막혀도 참아내야 해/화가 치밀어도 웃어 보여야만 해/이젠 때가 온 거야/모두 부러워하는/달콤한 탈출에/오랜 세월 그대 앞에 가로놓인/그대를 가둬 놓은 높은 벽/그 벽을 넘는다면/그대는 행복한 노랠하는 하늘/그대는 기쁜 춤 추는 바다/끝없이 펼쳐지는 자유     


이따금 한 걸음 물러나 탈출해보라고 독려하는 노래 같죠. ‘그대는 끝없이 펼쳐지는 자유’라는 후렴구를 듣고 있으면 귓속이 뜨거워질 정도로 감동이 느껴져요. 그 감동은 ‘어디로 가나요’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도망쳐요’라는 마지막 노랫말에서 제 머릿속은 이미 제주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까요. 제주 바다가 딱히 낙원까지는 아니지만요.      


매일 아침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자고 다시 일어나고를 반복합니다. 직장인의 숙명입니다. 꿈꿔온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글자’를 다룬다는 점은 좋았지만 현실의 벽은 예상보다 더 높고 거대했습니다. 도저히 이 벽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럴 때면 이 노래를 듣습니다. 여전히 저는 제가 누군지 모르겠고, 이 길에 대한 확신도 없고, 뭐가 맞고 틀린 것인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은 따뜻해집니다. ‘그래도 내가 혼자는 아니었구나’라고 느끼는 거죠. 맞습니다. 저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얇디얇은 끈으로 연결돼 있어요. 평상시 아주 느슨했던 끈은 공감과 연대가 필요할 때면 바짝 조여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넌지시 웃으며 바라보는 거죠. 괜찮아. 너는 혼자가 아니야. 고개를 숙여 당신의 두 발을 내려다보세요. 비틀거리는 두 발 아래, 땅속 어딘가에는 영혼들이 우리의 두 발을 단단히 붙잡아주고 있습니다. 흔들리더라도 아주 쓰러지지는 말라고 말이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계속 걸어가세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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