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햇살의 알람 소리에 새벽같이 눈이 뜨여졌다. 첫 여행의 피곤함에 지쳐 잠든, 아들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봤다.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평온해 보이기도 하다. 뽀얀 속살처럼 부드러운 볼에 살짝 입술로 정을 나눈다. 아빠와 아들의 여행길 둘째 날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
[직접 빚은 '청주'를 선물로 받다]
씻고 짐 정리하고 나오니 현관에 '청주'가 놓여 있었다. 손수 직접 빚은 것이라며 맛보기로 담았단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게 된다. 아마도 새벽잠 없이 부지런이 일하려 나가시기에 이렇게 메모로 온정을 남겨두신 듯하다.
아침은 거르고 다시 출발했다. 아직까진 어제 먹은 산채비빔밥의 여운이 남겨져 있다. 어제 묵은 곳을 지나고 경호강이 바라보이는 다리를 건너 강변길로 쭈욱 걸어갔다. 아침 운동하는 분들과 마주치면 살짝 미소만 보내줘도 서로 살가워진다.
[작고 소박한 계곡에서]
2시간 정도 걸은 후에 만난 조그마한 계곡에서 한껏 뜨거워진 발을 식히고 있다. 한 중간에 놓인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것 같다. 자연이 수 놓은 곳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아침재 고개]
6코스의 종착점인 성수원을 지나 아침재에 도착했다. 상대적으로 7코스에 대한 이정표는 허술하게 되어 있어서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우회하면 식당이 있답니다]
되돌아가고 되돌아가다!
어천마을 쪽으로 우회하면 식사할 식당이 있다는 설명에 40분 정도 힘겹게 걸어 갔는데, 여기는 둘레길 코스가 아니니 되돌아가라는 표지판 하나에 허탈함과 허무함을 안고 갈라진 길의 초입으로 다시 되돌아 왔다. 아들의 실망감과 불만 그리고 허기짐을 뒤로하고 목표한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다시 걸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식당도 여름철 한때만 한다고 한다. 왠지 모를 상술에 속은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침재를 지나 헬기장이 있는 웅석봉으로 향했다. 아침, 점심을 거르고 간식과 물 2통이 가진 전부였다. 둘레길중 가장 난코스가 여기라는데 너무 준비 없이 막무가내로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개인 사유지라며 곳곳에 입산금지 푯말과 경고문구들이 길을 막고 있다. 아마도 여행객의 발길이 많아지며 개인 재산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고 불편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둘레길 코스라는 이정표와 들어오면 범법자 취급하겠다는 푯말 앞에서 암담해하며 머뭇거리게 된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무조건 걸었다. 하지만 이 푯말이 내 몸에 대한 경고 푯말이었음을 1시간 후에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아침 7시 반에 출발해서 6코스를 지나 한참을 헤매다 15시경 7코스 헬기장 바로 밑에서 무릎 꿇고 말았다. 물도 떨어졌고 먹지 못한 허기짐에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힘들어 쉬고 몇 걸음 오르다 또 쉬고를 반복하니 불평하던 아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빠가 측은해 보였나 보다.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 묵묵히 내 배낭을 짊어진다. 자기가 매겠다면서 말이다. 아들이 많이 컸구나라는 대견스러움이 힘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10여분의 고민 끝에 발길을 돌려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힘겹게 오른 길 접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오늘은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날인가 보다.
하산하면서 가장 가까운 어천마을을 찾아서 내려갔다. 하산길도 무척이나 힘들다. 우선 무엇이던 먹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천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마을전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알록달록한 색깔을 입은 집들이 옛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색깔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풍경이 좋아 외지인들이 귀촌하며 사는 동네인 듯하다. 막 첫 집을 지나는데 화단을 가꾸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지나치다가 되돌아가서 물어보려 하니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물이 맑으니 마시고 가라는 것이다.
물 한 모금에 따스함을 마셨고,
물 한 모금에 시원함을 마셨고,
물 한 모금에 시골의 정을 맘껏 마셨다.
드디어 먹을 것이 생겼다!
아침, 점심을 못 먹었습니다. 주변에 밥 먹을 곳이 없나요? 라고 말하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아주머니 또한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시며 감자라도 먹겠냐는 것이다. 여기서 No라고는 절대 말 못한다. 너무 허기졌기에 감사하다며 인도해 주시는 앞마당 돌 정자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시원하게 얼린 감자와 계란 프라이 그리고 영혼을 울린 만큼 시원한 커피 한잔에 허기짐과 피곤함을 씻겨 내려갔다. 정성 들여 나그네 부자를 대접해주시는 온정에 눈물 날만큼 감사함을 받았다.
아들은 말한다. 요즘도 이런 분이 있네요!
여행의 목적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렇게 따스한 온정을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에도 여행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천 마을에서 아들과 함께]
이제 좀 살만해졌다. 추억을 남기고 아내에게 전해 줄 오붓한 부자의 셀카 사진 한 장을 담았다. 아들과 함께 하는 셀카 진짜 찍기 힘들다. 사춘기 아들의 미소 띤 표정이 너무 어렵다. 그래도 여러 번 회유하고 압박해서 얻은 사진이다.
그러나 아내는 말한다. 아들 표정이 왜 그러냐고?
[ 어천마을 - 민박집 풍경 ]
잘 먹고 난 후, 민박집도 소개해 주셔서 구했다. 보기에는 허름해 보여도 안은 넓고 시원하다. 민박 바로 아래 계곡이 있어 모든 것 풀어헤치고 계곡에 발을 담갔다. 시원함에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계곡에 담근 발이 말한다. 오늘 하루 고생했다고 위로해주며 "실패도 경험이고 포기도 자산이다"라고!
오늘 하루, 섣부른 판단과 도전 그리고 포기하는 과정들을 통해서 삶의 작은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힘겨울 때 아직까진 따스함을 공유할 수 있는 분들이 있음에 뿌듯한 하루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함께 이 길을 걷는 아들이 있음에 감사한다. 또한 가정에서 힘껏 응원해 주는 아내에게도 감사한다. 오늘 이 밤은 감사가 감사를 낳고 차가움이 따듯함으로 변해가는 그런 밤이어서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