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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Oct 14. 2024

그래서 결국 돌아오고야 말았다.

왜 안 가셨어요? 6

우리나라와 다른 위생관념도 이해가 가지 았다. 스웨덴에서는 아주 어릴 때부터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시켰다. 한참 뭐든지 입으로 넣는 한두 살짜리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선생님이 잘 본다고 해도 한 명당 여러 명을 챙겨야 하지 않는가. 모래를 먹건 모래를 뿌리던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뒤처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흙투성이가 되어 흙놀이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그러다 빵이 바닥에 떨어지,면 선생님이 못 보는 사이 아이는 흙 묻은 빵을 주워 먹고 있었다.

양치는 또 어떻고.. 매달 ‘새 칫솔로 바꿔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던 한국과 달리, 스웨덴에서는 양치를 시켜주기는커녕, 아이들이 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애초에 하루 2번 양치를 교육하는 나라였다. 다 같이 서서 양치를 할만한 큰 개수대가 있는 한국과 달리 스웨덴 어린이집의 개수대는 화장실 쓴 뒤 손 씻기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아침에 와서 과일 먹고 11시 밥 먹고 2시쯤 간식 먹고 4시쯤 또 과일을 먹으니 모든 애들을 매번 양치를 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점심 먹고 한 번은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겨울은 생각했다.


서머타임이 끝나자, 낮의 길이가 미친 듯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한겨울에는 아침 9시가 넘어 느지막이 해가 뜨더니 오후 2시가 지나면 해가 졌다. 한낮에도 해는 중천에 떠있지 않았다. 그냥 조금 올라왔다 금세 내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짧은 낮마저도 해를 못 보는 날이 잦았다. 구름이 잔뜩 낀 잿빛의 하늘 뒤에 다시 칠흑 같은 어두움이 반복되자, 겨울은 한국의 겨울이 그리워졌다. 아무리 해가 짧아졌다고 한국은 오전 9시면 환했다. 심지어 해가 제일 짧은 동지에도 한국 해는 오후 5시까지는 하늘에 있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좀 나았다. 하늘은 어두워도 땅이 하야니 말이다. 그또 다행인 건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았다. 물에 둘러싸인 스톡홀름의 지리적 특성 때문인지 한국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 평균기온은 영상 3도에서 영하 1도 정도밖에 안 내려갔다. 서울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지인이 날씨가 어떠냐고 물을 때마다, 겨울은 '추운 건 괜찮아, 어둠이 문제지.'라고 답하곤 했다. 겨울은 자신이 이렇게 해에 민감한 사람인지 서른이 넘게 살아오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온 지 반년만에, 해만 나면 왜들 바깥에 나와 앉아있는지 알게 되었다. 바람이 쌩쌩 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따사로운 햇살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꼭 불편하고 나쁜 건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 서서 길을 건너려고 좌우를 둘러보면 지나가던 차가 멈추고 겨울과 아이가 건너가기를 기다려줬다. 늘 항상 바쁘고 급한 한국과 달리, 여기는 여러모로 여유가 있었다. 결제가 잘 안 되면 다른 쪽으로 미뤄놓고 다음 사람 물건을 바코드를 찍기 시작하던 곳에서 살던 겨울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아무런 말과 행동 없이 조용히 기다려주는 계산원이나 뒷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을 뛰어서 타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도로에 경적소리를 듣는 일도 거의 없었다. 지금 당장 안 되면 세상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굴지 않아도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정착할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일단, 겨울이 거기에서 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스웨덴이 북유럽에선 제일 잘 나간다고 해도, 고작 인구 1천만 명의 유럽 변방이었다. 구직시장이 너무 작았다.


게다가 스웨덴은 스웨덴어를 쓴다는 사실이 겨울에게 큰 허들로 다녀왔다. 스웨덴어를 필요로 하는 자리를 다 지우고 나면 남은 건 fluent both in  writing and speaking. 모두 유창한 영어실력이 필요한 자리들이었다. 대학시절 종로에 있는 어학원을 다니며 어찌어찌 토익 점수는 만들어 취업했지만, 실전 회화나 작문은 영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기술이라도 있었으면 영어가 좀 부족해도 의사소통가능한 정도로 취업을 할 테지만, 겨울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는 한국어 그리고 한국시장에 국한된 것들뿐이었다.‘문과라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취직이 된 채 오는 경우가 아니고 스웨덴 현지에서 취업을 하려니, 스웨덴에서 일한 경력과 레퍼런스, 인맥이 큰 영향을 끼쳤다. 겨울이 쌓아왔던 커리어는 여기에서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이력서를 이름 모를 기업까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기업에 원서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겨울은 이미 한국에서는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제품을 만드는 대기업 본사에 다니고 있지 않은가? 스웨덴에서 모르는 기업이나, 한국기업의 현지채용으로 들어가는 것은 커리어상 너무도 명백한 다운그레이드였다.

그래서 누가 들어도 알만한 기업 몇 개에만 소심하게 이력서를 내봤다. 하지만 겨울 자신이 봐도 그 기업에서 자기를 뽑을 이유가 없었다. 경력은 긴데, 스웨덴 또는 북유럽 시장을 전혀 몰랐고, 스웨덴어를 할 수 없었으며, 영어 의사소통 또한 유창하지 않았다. 결국 면접까지도 못 가고 바로 서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겨울이 회사를 그만 둔 채, 외벌이로 스웨덴에 머물기는 충분하지 않았다. 높은 세율과 부담스러운 월세를 내고 나면, 쓸 수 있는 돈이라고는 백만 원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그걸로 네 식구 먹고 입는 걸 대려면, 저축은커녕 한국에 있는 저금을 끌어와야 할 지경이었다.

즉, 소위 말하는 가처분 소득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 하지만, 그런 남편의 월급도 스웨덴에서는 꽤 높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다들 맞벌이를 하는 거였구나.


양성평등이니 여성의 자아실현이니 하는 허울 좋은 포장 아래에는 생계유지가 써져 있었다.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했던 것이었다.

정해진 육아휴직 기간이 끝나자, 겨울은 미련 없이 한국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복귀했다. 다시 구직시장에 나가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할 필요 없었다. 겨울에게는 돌아오기만 하면 앉을 수 있는 책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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