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월 중순이 되어 간다. 춥다. 정확히는 다시 추워졌다. 함부르크 날씨가 변덕스럽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추울 일인가 싶게 춥다. 그래도 휑하던 캠퍼스는 사람 냄새가 나며 북적북적 따뜻해졌다. 봄을 알리는 화사한 노을도 보았다. 새 학기의 둘째 주다.
이번 주는 정말 학생으로서 바쁜 한 주였다. 지난 학기도 바쁘고, 과제도 많았지만, 이번 학기가 유난히 새롭게 느껴지는 건 아마 논문 때문인 것 같다. 이번 주는 3일 연속 논문을 위한 콜로키움 수업이 있었다. 각자 자기 논문에 대한 계획을 짧게 발표하고 자유롭게 토론하거나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번 학기가 아닌 다음 학기에 쓸 예정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수업을 들어야 했다. 원래 논문은 여름 학기에 쓰기 때문에 논문 관련 수업은 여름 학기에만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에 있었던 인턴십 발표에서는 두 번째 학사를 하는 업무 경력이 있는 유학생으로서 득을 봤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논문은 한국어로도 써본 적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졸업했던 학과는 논문이 아닌 졸업 시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써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찌어찌 독일어로 수업을 듣고 있지만 쓰기는 또 다른 레벨이다. 그것도 논문이라면 더더욱. 문법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학술적 글쓰기에서는 이것저것 지켜야 하는 규칙이 영어보다 더 많다.
몇 년을 공부하고도 어찌 독일어로 쓰기도 못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로 변명을 해보자면 진짜 언어천재가 아닌 이상 나중에 배운 외국어일수록 습득이 느린 게 정상이라고 했다. 나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독일어 순서로 편안하게 느낀다. 이미 외국어 두 개가 먼저 들어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독일어가 느린 것은 당연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논문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콜로키움은 지도 교수에 따라 진행되는 날짜나 스타일이 다르다고 했다. 내 경우, 아주 이른 학기 초부터 2시간씩 4일 동안 다 같이 모여서 했다. 첫날에는 가볍게 자기소개와 함께 자신의 논문 주제를 소개하고, 논문이나 구술시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졸업 논문 방식이라고 해서 논문만 내면 끝이 아니라 그 논문에 대해서 구술시험을 본다고 했다.
내 지도 교수님 콜로키움 수업에는 나를 포함해서 약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이번 학기에 논문을 쓰는 학생 반, 다음 학기에 쓰는 학생이 반이었다. 짧은 자기소개와 논문 주제를 들었다. 우리 과의 특징은 도시 문화에 관련된 건 내가 잘 연결시킬 수만 있다면 정말 거의 무엇이든 논문 주제로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 도시 인프라, 정체성, 축구 팬 문화, 도시 안전, 디지털 툴 등 논문 주제도 정말 다양했다. 나는 이스포츠가 도시 문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쓰기로 정했다.
지금 내 두 번째 학사 전공은 도시문화학. 처음에는 첫 번째 학사로 일어일문학을 전공하고 게임 회사를 다니다 퇴사한 내 이력을 보았을 때 관련성이 없는 상당히 생뚱맞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저 이게 재밌어 보였다. 그리고 막상 해보니 힘들긴 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과는 꽤 다르다는 생각에 고민도 많았다. '게임 회사 PM'이라는 경력과 '도시문화학'이라는 새 학사 사이의 간극이 스스로도 오랫동안 생소했다. 당시에는 직업을 바꾸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다고는 하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첫 번째 학사와 업무 경력이 전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논문 주제를 정할 때가 되니 그 사이에 숨어있던 다리가 보였다. 여러 가지 주제 중에서 고민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반복하다 보니 그동안 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다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하나의 다리가 아니었다. 그동안 도시문화학에서 배운 지식들을 이스포츠에 적용하여 살펴볼 수 있는 영역이 너무 많아서 추리는 데 고민이 될 정도였다. 여기에 대한 내용은 좀 더 정리가 되는대로 적어보고, 오늘은 논문 주제를 결정하면서 들었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처음부터 이스포츠에 대해 적겠다고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처음엔 방향성을 잡기 힘들었고, 그 다음에는 찬찬히 유학 생활 동안 내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에 대해 돌아보았다. 그렇게 세 가지 주제를 추렸다. 이스포츠 외에도 유학생으로서 바라보는 문화적 다양성과 정체성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서도 고민했었다. 이 세 가지 주제는 관련성이 없는 전혀 다른 주제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는 주제'라는 것이다. 다소 마이너 하달까? 유학생, 동물, 이스포츠 모두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주목받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사회는 유학생보다는 이민자, 동물보다는 사람, 이스포츠보다는 소셜 미디어에 더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스포츠를 선택한 건 개인적인 이유가 컸다.
게임은 그동안 내 인생에서 애증의 대상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으면서도 부정적인 사회의 인식에 눈치 보느라 더 마음껏 좋아하고 티 낼 수 없었던 나의 오랜 취미.
그래도 운 좋게 내가 게임 회사에 들어간 후부터 업계가 많이 성장해서 부모님의 부정적인 인식도 많이 바뀌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덕업일치라고도 생각했지만, 그 일로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울 수는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 아이러니한 건 게임 회사를 다닐 때는 바빠서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할 시간이 없었고 (혹은 그럴 에너지가 없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좋아하는 게임을 실컷 하던 날이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놀아버렸다는 자괴감에 괴롭기도 했었다(사실 원인은 게임이 아니었지만). 먼 타국에 와서 유학생으로서 게임을 하면 그 자괴감은 두 배, 세 배였다. 너무 바쁜 한국 사회가 맞지 않아 나왔는데, 뼛속까지 한국인인 내 속에는 타향살이에서는 어쩐지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감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사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쉬어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내 라이프 스타일에 있었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외식 한 번 하는 것도 생각이 많아지는 소심한 늦깎이 유학생인 내게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이 때로는 게임 때로는 드라마 때로는 유튜브였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게임이라는 취미가 있었기에 외로운 이 유학 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모두 떠나 게임이 내게 가져다준 것과 내게서 앗아간 것을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해 보았다. 적어도 내게는 게임이 가져다준 것이 더 많았다. 적어도 내게는, 살면서 내가 힘들었던 순간 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게임 덕이 컸다. 게다가 사회적 인식도 어디까지나 '남의 시선'일뿐.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적게 신경 쓰는 삶을 살려고 노력 중인 지금, 오히려 '이스포츠'를 내 논문 주제로 선택함으로써 내 무의식 깊이 자리 잡은 사회적 인식을 부수고 싶은 마음이랄까.
논문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한 가지 분명한 건 게임 회사를 다닐 때보다, 게임을 주제로 도시문화학 논문을 준비하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일단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닐까.
*커버 이미지 출처: Unsplash의Krzysztof Maksimi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