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 대리가 있다. 마이동풍 같은 대리라 하여 마 대리라 한다. 여자고 나이는 서른 초반, 입사는 6년 차쯤. 나는 대기업에서 계약직 비서로 일했고, 다가오는 계약만료의 압박과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이직한 회사가 지금 바로 이 중견기업이다. 내가 이곳의 인사총무팀에 입사했을 때 마 대리를 처음 만났다. 그때 마 대리는 입사 2년 차에 비서로 일하고 있던 직원이었다. 계약직 비서로 일하며 서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많았기에 이 회사에 비서가 따로 있는 걸 보고 내심 안도했었던 기억이 난다.
심술보 득실득실. 처음 만나 건네는 나의 인사를 무시하고 뭐 보듯이 훑어보던 마 대리의 첫인상이 딱 그랬다. 그런데도 그녀를 딱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때의 나는 계약직이 아닌, 특히 비서 보직이 아닌 새로운 업무로 새 출발 한다고 신이 나 있던 정규직 열혈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입사 일주일째 되던 날의 오전, 경영지원본부장이 마 대리와 나를 회의실로 소집했다. 영문도 모른 채 회의실에 끌려간 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오늘부로 너희 둘 보직 바꾸기로 했으니까 지금 자리로 돌아가서 짐 옮기고 바로 인수인계해.”
당황해서 입만 떡 벌리고 있던 나와는 달리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히죽히죽 웃어대는 마 대리. 알고 보니 내가 입사하면 하게 될 인사총무일을 마 대리 본인이 하고 싶으니 보직을 바꿔 달라고 상부에 청을 넣었다고. 다른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날 채용했다는 더 흉흉한 음모론이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1차로 인사총무팀장에게 찾아갔다.
“팀장님. 저는 다른 회사에서 비서로 일을 했었고, 적성과 전혀 맞지 않아 이직한 게 이곳입니다. 회사에서도 절 비서로 뽑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비서 업무를 하게 될 줄 알았다면 지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재고해 주세요.”
그러자 2차로 나를 발령 냈던 경영지원본부장이 나를 불렀다.
“회장님이 이미 결정하신 일이니 그냥 비서로 있어 주면 좋겠다.”
그래도 못하겠다고 하니 3차로 회장이 나를 불렀다.
“2, 3년 정도만 비서로 일해주면 네가 원하는 부서 어디든지 보내줄 테니까 일단 비서를 해라.”
스물여섯의 나이가 어리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그때의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백수가 되는 건 인생이 끝장나는 일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인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라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애사심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온 게 벌써 3년이 지나 4년 차에 접어들었고 그동안 보직변경은커녕 계속, 쭉, 변함없이 아직도 나는 비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장이 급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주눅이 들었다. 열심히 입안을 혀로 헤집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사장을 보니 노트북에 올려진 나의 차가운 샌드위치가 볼품없어 보인다.
“다녀오셨습니까.”
“음.”
내 앞을 스쳐지나 사장실로 향하는 사장의 뒷모습을 가재눈으로 흘겨보며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계속 컨벤션 센터에 있어야 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들어온 건진 몰라도 어쨌든 나에겐 불행한 일이다.
탕비실에 들어가 찬장에서 잔을 꺼내어 커피를 탔다. 짝다리를 짚고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저으며 적당히 좁고 지저분한 탕비실 구석구석을 짜증스럽게 훑어보았다. 오전에 영업본부에서 사용한 유리컵 열 개, 도시락을 싸다니는 직원의 것으로 추측되는 반찬 통 여러 개, 그리고 립스틱이 진하게 묻은 커피잔 두 개가 싱크대 안에서 어지럽게 쌓여있었다. 전자레인지 문은 또 누가 열어놨냐. 어우, 반찬 냄새. 벽지 얼룩 봐라. 이백여 명의 직원들이 솔선수범하여 이 탕비실을 함부로 사용해 준 덕에 새 건물로 이사 온 지가 고작 한 달인데, 최소 삼 년은 묵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특히 거슬리는 이유는 얼마 전 마 대리의 주도하에 탕비실 관리를 내가 온전히 떠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사무실 이사 다음 날.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나에게 기분 나쁜 게 있다는 듯 일주일가량 툴툴대던 마 대리가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비서실 앞에 부루퉁한 얼굴로 다가왔다.
“유진 씨. 정리 잘 돼가?”
“네, 뭐. 그럭저럭요.”
“아니, 다른 게 아니고 우리 인사총무팀 일이 좀 많아져서 유진 씨가 탕비실을 전적으로 관리해 주면 좋겠는데.”
“네? 제가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탕비실이 유진 씨 자리 바로 뒤에 있으니까 유진 씨가 하는 게 맞긴 하지.”
“인사총무팀에서 관리하기 힘드시면 공지를 띄우세요. 깨끗하게 사용하고 뒷정리도 잘하자고요. 대리님 말씀대로 탕비실이 제 자리 바로 뒤에 있으니까 체크는 할게요.”
“아니, 유진 씨. 내가 비서일 때는 내가 다 했거든? 유진 씨를 비서 자리에 앉힌 게 미안해서 탕비실 관리를 인사총무팀으로 가지고 간 거야. 원래 비서가 탕비실 관리하는 건 기본인 거 몰라?”
“네.”
“아니, 그동안 내가 유진 씨 눈치 보여서 말을 안 한 거야. 그래도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싶었는데, 유진 씨한테는 일일이 말을 해야 되네?”
“비서 전용 탕비실도 아니고 이백 명 넘는 직원들이 다 같이 사용하는 공간을 비서 혼자 관리하는 게 기본이라고요?”
“아니, 나는 다 했었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근데 유진 씨. 요즘 무슨 일 있어?”
“없는데요. 왜요?”
“아니, 틈만 나면 멍 때리고 있길래.”
“제가요? 언제요?”
“아니, 평소에 많이 봤어. 아까도 싱크대 앞에서 신나게 멍 때리고 있더구먼.”
“평소에 멍 때린 적 없고요. 아까는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회계팀 커피 심부름을 저한테 시키잖아요, 바빠 죽겠는데.”
“아니, 유진 씨. 내가 비서일 때는 내가 다 했어. 그리고 유진 씨는 경영지원본부 소속이잖아. 같은 본부에 속한 회계팀, 인사총무팀, 자재팀 차 심부름은 기분 나빠하지 말고 그냥 해. 또 그게 맞아. 덩치 큰 남자 직원들이 조그만 쟁반 들고 차 심부름하는 거 내가 봐도 보기 안 좋아. 뒷말도 많이 나오고.”
“차 심부름을 남자가 하든지 여자가 하든지 전 관심 없고요. 그냥 팀에서 알아서 하자는 거죠.”
“아니, 그래도 유진 씨는 내가 비서 일 때보다 잡일 적게 하잖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너무 선 긋지는 말자.”
“대리님. 자꾸 대리님이 비서일 때보다 제가 잡일 적게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대리님이 비서 때보다 회사 규모 몇 배나 커졌고요. 회장님, 사장님 스케줄도 몇 배나 늘어서 제가 하는 일도 더 많아졌어요. 대리님이 했던 어떤 잡일은 덜 할지 몰라도 대리님이 안 했던 또 다른 일은 더 하고 있다고요. 일전에 인사총무팀에서 제게 잠깐 도와달라 그랬던 공장 구내식당 세 군데 관리하는 거, 저 그거 2년째 하고 있는 거 아시죠? 특근비도 제가 처리하잖아요. 몇 달 전에 회계팀에서는 인터넷 결제용 법인카드를 제가 제일 많이 쓴다고 관리부터 마감까지 저보고 하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탕비실도 저 혼자 관리하라고요? 도대체 제가 비서인 건지, 인사총무팀원인 건지, 회계팀원인 건지. 대리님 말마따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제가 도우면 언젠가 도움받을 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왕 하는 거 기분 좋게 하려고 되게 애쓰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마 대리님 비서일 때보다 잡일을 덜 한다고 지적만 하시니 기분이 썩 좋진 않네요.”
“아니, 나도 비서일 때 다른 팀 일 많이 했어. 뭘 또 예민하게 지적이래, 부탁이지. 조만간 업무 분장 다시 한다고 하니까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아무튼, 이미 다 결정됐으니까 탕비실 잘 부탁해. 이왕 하는 거 이것도 기분 좋게 하라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존나 스트레스받네.
마 대리는 탕비실을 떠넘긴 그날 이후로 내게 살갑게 대했다. 그녀와 동갑내기인 어느 여자 과장으로 타깃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임신했는데 당당하게 다니는 게 꼴 보기 싫다나 뭐라나.
“유진 씨!”
젠장, 사장이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