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인사팀원으로 입사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의 조용한 오전. 경영지원본부장이 비서였던 마 대리와 나를 회의실로 소집했다. 영문도 모른 채 회의실에 끌려간 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오늘부로 너희 둘 보직 바꾸기로 했으니까 지금 자리로 돌아가서 짐 옮기고 바로 인수인계해.”
그렇게 취업 사기를 맞은 지 3년째 되는 날의 오후 두 시, 오늘도 인상을 잔뜩 쓰며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왼손에 휴대폰을 들고 계산대 앞을 지나 샌드위치가 진열된 쇼 케이스 앞에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멈추어 섰다. 햄 치즈 샌드위치. 망할 놈의 골프부킹. 바비큐 치킨 파니니. 해달라고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건지. 메뉴에 대한 고민과 방금 있었던 일을 번갈아 떠올리며 짜증스럽게 베이컨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다가섰다. 근데 뭘 마시지?
“이거랑 아이스 라테 그란데 사이즈 샷 추가해서 주세요.”
직원을 귀찮게 하는 손님이 되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하는 한 문장. 나는 라테를 매우 좋아하지만 라테가 아닌 음료도 좋아한다. 특히 샌드위치를 먹을 때는 더더욱. 오늘같이 메뉴를 결정하기도 전에 계산대 앞에 몸이 먼저 가버린 경우 나는 대개 직원을 앞에 두고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는 나 대신 곧장 라테를 주문하는 나를 선택한다. 계산대 앞에서 망설이는 몇 초간의 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엄청난 폐가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을 떨쳐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주문 직후 직원의 머리끝에 살짝 가려져 있던 그린티 프라푸치노 메뉴가 눈에 깊숙이 들어왔지만 앱으로 서둘러 결제를 마쳤다.
픽업대 앞에 기대어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진 맞은편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비서실에서는 결코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화창함을 아주 많이 늦어버린 점심을 대충 해결하고자 방문한 스타벅스에서 아련하게 느끼고 있자니 어쩐지 우울해졌다.
픽업대에서 음료와 샌드위치가 올려진 쟁반을 건네받아 해가 들지 않는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휴대폰도 그 옆에 내려놓을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네, 박 과장님.”
“유진 씨, 어디예요? 자리에 전화를 안 받아서.”
“점심을 못 먹어서 샌드위치 사러 잠깐 1층에 내려왔어요.”
“그래요? 사장님 방금 올라가셨어요.”
“네. 지금 바로 올라가요.”
전화를 끊고 질끈 눈을 감았다. 휴대폰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우고 쟁반을 다시 픽업대로 가져갔다. 라테와 샌드위치만 들고 스타벅스를 뛰쳐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지하라고 표시된 숫자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영 께름칙해졌다. 설마, 사장? 고개를 돌려 다른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확인하다 1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 한 대를 발견하고는 얼른 버튼을 눌러서 올라탔다. 25층과 닫힘 버튼을 수차례 연타해 문을 닫고 나자 차가운 샌드위치와 라테를 들고 휴대폰이 떨어질세라 왼쪽 겨드랑이를 꼭 붙인 채 불안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이 엘리베이터 문에 비쳐 보였다. 참 없어 보이기도 하지.
25층에 도착하자마자 코 앞에 있는 비서실로 뛰어들어갔다. 음료와 샌드위치 그리고 휴대폰을 노트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곧 도착할 사장을 맞이하기 위해 반듯하게 섰다. 부디 그의 눈에 내가 이 자리를 변함없이 잘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길 바라며.
비서실은 엘리베이터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안내데스크처럼. 이 점은 비서를 한층 더 하찮게 보이도록 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회사가 비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임직원이 나를 비서이기보다 안내원으로 생각하여 자기들이 꺼리는 온갖 접대를 대신해 주길 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누가 봐도 안내데스크처럼 생겼고 누구도 비서실이라 칭해주지도 않지만, 강제로 비서가 된 것도 억울한데 하찮아 보이는 내 자리마저 스스로 깎아내리면 너무 서러우니까 앞으로도 나만큼은 내 자리를 비서실이라고 격을 어느 정도 높여 부르도록 하겠다.
아무튼, 앞으로는 엘리베이터 뒤로는 탕비실을 끼고 있는 불쾌한 위치적 상황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방문객과 직원들을 마주해야 하고, 한번 거르면 한번 듣는 시답잖은 인사치레 말들도 상대하지 않을 수 없기에 매일 감당해야 하는 감정 소모가 상당하다. 앞서 말했듯이 나를 좋게 말하면 안내원, 나쁘게 말하면 다방 접대부쯤으로 생각하는 임직원이 많기 때문에 보직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다.
수치심을 느끼는 여러 가지 상황 중에서도 회장이나 사장이 올라오기까지 서서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을 손꼽아 싫어한다. 노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여느 때보다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오너에 대한 비서의 아주 당연한 바른 자세 중 하나이기도 할 테지만, 이렇게까지 수치스럽다 여기게 된 건 서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질겁을 하면서 도망가곤 하는 임직원의 행동거지 때문이다. 회장과 사장을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 그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나는 그들처럼 꽁무니를 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비서니까. 홀로 남겨져서 많은 사람이 꺼리는 무언가를 감내해야 하는 건 언제나 외롭고 수치스럽다. 그래서 긁힌다.
그렇게 싫으면 애초에 비서가 왜 되었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까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강제로 비서가 되었다. 애초에 비서를 지망한 구직자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원치 않는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사정은 복잡하다. 아니, 복잡하지 않나.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비서 자리에 앉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취업을 위해 다시 애쓰며 살아야 하는 구직자로 돌아가야 했었을 테니까.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