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또렷한 나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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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2월 2일의 무無산책 -


틈을 내서라도 광합성을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실패했다. 집에서 할 일이 많았다. 오전엔 빨래, 전화 두 통 걸기, 식단 일기 두 편 작성, 시장 다녀오기, 도서관 다녀오기, 밥하기, 설거지, 공모전에 제출할 글 수정, 독서, 아이들 공부 봐주기, 지인에게 선물 보내기, 화장실 청소, 집 청소를 했고 오후엔 그림 수정, 새로운 글쓰기, 그릇 정리, 행주 삶기, 빵 만들기, 밥하기, 설거지를 했다.


나는 푸다다다 돌아가는 미싱이 아닌, 한 땀 한 땀 수놓는 바늘이다. 할 일이 많을 땐 효율성 높은 존재가 되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는 느릿느릿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끼니를 다 챙겨 잡숴서 내 육체는 늘 충전 100%인데도 나의 모터는 저속 모드이다. 꼬물꼬물 빨래를 널고, 야금 야금 화장실 바닥을 문질렀다. 나는 속도 지상주의 세상의 영원한 부적응자이다.


육체노동뿐 아니라 정신노동에서도 속력이 안 올랐다. 내 글은 비루했고 그림은 액정 위에서 표류했다. 오늘 마무리하고 싶은 분량이 있었지만 계획대로 될 가망이 없었다. 그림과 글을 조금 매만졌을 뿐인데 저녁 먹을 시간이 돼 버렸다.


둘째 아이가 나에게 저녁 메뉴가 뭐냐고 물었다. "나도 그게 궁금해."라고 대답했다. 오늘은 산책 갈 시간은 물론이고 시장 갈 시간도 없었다. 도둑 든 집처럼 텅 빈 냉장고를 괜히 한번 들여다본 뒤 아이들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큰애는 오므라이스, 막내는 김밥이란다. 오므라이스의 필수 재료는 계란이다. 우리 집은 채식을 해서 계란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 가끔은 나도 수고를 덜고 아이들에게도 당기는 음식을 허용해 줘야지. 분식집에서 오므라이스와 김밥을 배달해보자. 난생처음으로 휴대폰에 배달 앱을 깔아 보았다. 내 개인 정보를 콸콸 쏟아부으며 가입을 반쯤 완성했을 때 앱에 오류가 났다. 터치가 전혀 먹히질 않았다. 나는 앱 설치를 집어치웠다.


아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저녁 메뉴로 볶음밥을 선포했다. 애들은 하트 모양으로 케첩을 뿌려 먹을 거라며 입을 벌리고 떠들며 깔깔 웃었다. 아기 새들의 벌린 입은 케첩보다 더 짙은 빨강이다. 붉게 번쩍이는 그 공복 사이렌을 보며 굼뜬 어미 새는 부엌으로 어정어정 걸어갔다. 오랜만에 한 끼 쉰다고 생각했는데 별수 없이 칼을 잡아야 하는구나. 김이 빠진 나는 노동요를 틀었다.


내겐 '텐션업'이라는 음악 재생 목록이 있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시작할 마음조차 안 생길 때가 있는 법. 그럴 때를 대비하여 조금씩 모은 플레이 리스트이다. 미친 듯이 빠른 노래는 싫어해서 적당히 통통 튀는 즐거운 노래들을 수집했다. 마마무의 'Travel', 펭수 팬이 만든 '펭수 시티팝', 비긴어게인 3에서 패밀리 밴드가 리메이크한 Shawn Mendes의 'There's Nothing Holdin' Me Back', 페퍼톤스의 'Fast', Joy가 리메이크한 '여우야' 등이 내 동력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이다.


고개를 둠칫거리며 감자, 당근, 양파를 다지고 있는데 둘째 아이가 뜬금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딱 1초 안아주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작은 팔에 안긴 행복은 1초보다 길었다. 돌봐야 하는 가족과 나를 안아주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살아간다.


사슬처럼 이어지는 일을 해치우며 하루를 살다 보면 내 존재감이 흐릿해진다. 나 자신보다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또렷해져서이다. 일하는 나에게 자본주의는 시비를 건다. 너의 일은 뭘 생산하고 있니, 너의 노동은 얼마의 액수로 환산되니. 화폐를 생산하는 재주가 없는 나는 이 사회의 낙제자이다. 부지런하게 일하는 가난한 나는 거의 투명 인간이 된다.


그러나 나를 안아주는 가족의 팔은 내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인간임을 깨우쳐준다. 글· 그림 작업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을 시각화해준다. 산책도 같은 맥락에서 소중하다. 산책에선 걷기 말곤 할 일이 없다. 흔들리는 팔과, 땅을 누르는 발을 몇 십분 동안 감각한다. 걸음이 누적될수록 무수한 일거리는 가라앉고 내 몸뚱이만 부각된다. 가족의 사랑과 글·그림 작업과 산책은 그렇게 내 존재의 생생함을 높여준다.


짧지 않은 목록의 가사 노동과 작업들에 매달리다 보면 오늘처럼 나의 큰 즐거움인 산책을 단념해야 할 경우도 생긴다. 일감들 뒤로 나 자신이 가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사 노동은 사랑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내가 자발적으로 맡은 일이며 글·그림 작업들은 내 정신의 생존에 기여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 일이 계측 가치가 없는 짓거리라고 폄하하는 세상의 목소리는 거절이다. 내 일이 "이익을 위한 사냥"[1]이 아닌 것에 뿌듯하다. 나의 일들은 금쪽같은 산책을 미룰 만큼 소중하다. 시력 나쁜 세상이 어렴풋하게 인지하는 또렷한 나는, 내 하루를 나의 속도로 걸어간다.






1. 메리 올리버, 『긴 호흡』, 마음산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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