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차 May 13. 2021

귀성은 못했지만 명절은 명절

Copyright 2021. 녹차 all rights reserved.




2021년 2월 12일, 설날. 

설날에 우리 가족 넷만 있어보긴 처음이다. 코로나 확산 저지를 위해, 따로 사는 가족일 경우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래도 되나'와 '이래야겠지'라는 생각이 옥신각신했다. '사랑하니까 만나지 않는다'라는 '뉴노멀'과 나의 생체에 새겨진 명절 사랑법이 대치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마음 불편한 건 똑같았다. 결국 우리는 정부의 지침을 따랐다. 2021년 설날의 집콕러는 잘못한 게 없었지만 쓸데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귀성의 관성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집에만 있기 뭣했던 우리들은 자그마한 한옥 마을로 마실을 갔다. 거긴 나무가 많았고 개미굴 같은 골목이 있었고 길은 흙바닥이었다. 작은 카페도 하나 있었는데 마당에 대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대나무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통과시켰다. 폭신하게 깔린 대나무 잎을 밟고 노는 아이들을 보니 불편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한편 막내는 거기서 누군가의 똥을 밟았다. 고양이 것인지 강아지 것인지 모르겠지만 갓 태어난 똥임은 분명했다. 남편은 어느 양반 댁의 찹찹한 두벌대 기단에 앉아 막내의 왼쪽 운동화에 묻은 말랑한 똥을 나뭇가지로 긁어냈다. 큰애도 자기 아빠 곁에서 그 작업을 구경했다. 산 뒤로 넘어 갈랑 말랑하는 오후 4시의 겨울 햇살이 돌 위에 앉은 세 사람을 마지막 임무처럼 비추었다. 노르스름한 광선과 길쭉한 사람 그림자들이 내가 사랑하는 세 사람의 고운 배경이 되었다.


우리들은 복잡한 골목길에서 길을 헤맸다. 일시적인 미아가 됐지만 걱정은 안 됐다. 코너를 돌 때마다 등장하는 낯선 풍경이 즐거웠다. 전깃줄에 조르르 앉아 있는 까치의 수를 세기도 하고(여덟 마리), 하늘을 향해 뻗은 조밀한 혈관 같은 겨울 나뭇가지들을 눈으로 어루만졌다. 그곳엔 천여 개의 나뭇가지를 붙여 만든 새의 건축물도 설치되어 있었다. 시커먼 축구공 같은 둥지였다. 620살이지만 아직도 열매를 맺는다는 정정한 감나무도 보았다. 하지만 내 눈과 귀에 깊은 자국을 남긴 건 따로 있었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작은 창고 같은 게 나왔다. 창고 입구가 네모로 뻥 뚫려 있어서 내부가 시원하게 보였다. 창고 안쪽엔 콤바인과 대나무 뭉치들이 있었고 앞쪽엔 소가 있었다. 너무너무 큰 소였다. 우리들의 1~2미터 앞에 그 웅장한 동물이 서 있었다.


도시 촌놈 네 명은 이렇게 가깝고 큰 소를 처음 봤다. 거대하고 짙누런 소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여물통에 입을 담그고 으적! 으적! 소리를 냈다. 맛없어 보이는 짚을 맛깔나게 씹고 있었다. 우리들은 소에게 눈알 여덟 개를 몽땅 고정시킨 채 그것의 크기와 소리에 감탄했다. 헐 대박, 크기 좀 봐, 씹는 소리 좀 봐,라고 속삭였다. 한데, 우리의 소곤거림이 소의 식사를 방해했나 보다. 소는 천천히 몸을 돌려 우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우리도 보게 됐다. 두 번째 소를.


웅대한 소 뒤에 작은 송아지가 제대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어미 몸집의 1/5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가였다. 어미가 몸을 돌릴 때 드러난 아가는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망울의 주인은 우리 넷이 무서웠는지 엄마 뒤로 허둥지둥 숨었다. 그러자 어미소는 즉시 "우 어어어 어어어 어어어 어어어~!"라는 소리를 발포했다. 커다란 소리가 우리를 확 밀어내는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뒤로 휘날리는 것만 같았다. 저런 만화적인 표현이 사실은 현실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믿어버리게 될 법한 충격적인 소리였다. 어미소는 쇠로 된 봉에 줄로 매여 있었는데 자기 코에 꿴 코뚜레와, 뿔과 목에 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데도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소는 계속 소리 질렀다. 목을 긁으며 거칠고 걸걸한 소리를 토해냈다. 그 외침은 내 귀에 이렇게  동시통역되었다.


"꺼~져! 인~간~!"


우리들은 "미안해,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무안해져서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우리가 떠난 뒤에도 골목길엔 어미 소의 아우성이 몇 번 더 뒤울렸다. 순한 얼굴의 소가 꺼낸 순하지 않은 소리는 겁먹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휘두른 무기이자 자식 귀에 평생 맴돌 부모의 사랑이었다. 어미소의 목소리는 내 달팽이관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종이를 꾹 눌러 또렷한 곡선을 남긴 손톱처럼.


피붙이를 사랑하는 뜨거움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먼 거리를 달려가 만나는 것으로, 만나고 싶지만 꾹 참는 것으로, 때론 목청껏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소에게 욕 한 바가지 먹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흐뭇했다. 설핏 명절 기분이 났다.








녹차의 일러스트 샵 ▼

https://marpple.shop/kr/nokcha


이전 08화 쉼표를 훔치러 가야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