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건

내 속은 비어있다. 이 안에 들어오는 자가 내 주인이다. 이제 몇 분후면 주인을 만난다. 상자 안에서 우리 반지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또 만나자. 우리.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상자가 열린다. 눈이 부신다. 흰 장갑을 낀 손이 날 들어올린다. 그리고 날 꺼낸다.


“본인은 결혼하기 전까지 육체적 순결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까?”

진중하고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네.”


짧지만 강한 목소리. 내 주인이 될 사람이다. 믿음이 간다. 나는 흰 장갑을 낀 손에서 주인의 손으로 옮겨진다. 그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다. 나는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다. 그의 손가락에 꼭 맞게 들어간다. 그를 올려다보니 눈썹이 짙고 눈매가 매섭다.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이다. 양복을 입고 머리는 왁스로 잘 정리되어 있다.


자리에 돌아와 그는 오른손으로 날 쓰다듬어 준다. 온 몸이 떨린다. 자, 그럼 이제 목사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전서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내가 순결한 것처럼 너희도 순결하라. 나의 주인이 말씀을 따라 읽는다. 목소리가 참 멋지다. 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너희는 새로움을 입어라. 지금 티비를 보세요. 각종 폭력과 성범죄를 버젓이 방송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명확합니다. 너희 아내를 족한 줄 알고 그 샘물을 마시라. 너희는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한 몸이 되어라. 지금 여러분은 여기 하나님의 길을 본받으려고 오셨습니다. 참 훌륭한 청년들입니다. 자발적으로 이렇게 모였습니다. 제가 오라고 했습니까? 제가 시켰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그 고귀한 마음으로 여기에 온 겁니다. 그리고 삼 주간의 순결하게 산다는 게 과연 어떤 것인지 교육을 받고 이렇게 서약식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목사님에게 집중했다. 성경책 위에 놓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의 눈길이 자주 나에게 머물렀다. 자,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순결하게 살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부족한 저를 기다려 주시고 그리고 참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의 눈물이 내 위로 톡 떨어졌다. 난 그의 눈물을 내 안에 흡수했다. 난 그의 눈물로 인해 나만의 표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순결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식이 끝나고 그에게 백합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배 축하해요.

갈색 긴 머리를 한 여자애가 와서 백합을 건네었다. 고마워. 그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난 그의 볼이 발개지며 백합을 받을 때 살짝 손이 떨리는 걸 지켜보았다.


그가 나를 빼놓는 때는 단 두 번뿐이었다. 아침 세수를 할 때. 저녁 샤워를 할 때. 그마저도 조심스럽게, 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한번은 나를 빼놓다가 유심히 쳐다보면서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했다. 뒤집어 보고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안쪽 부분까지도.


“이거 무슨 반지에요? 형 여친 생겼어요?”

후배가 그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는 환히 웃었다.

“아냐. 임마.”

“그럼요?”

“그런 게 있다. 넌 몰라도 돼.”


그는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언제나 나를 지켜줄 테지. 이런 사람이라면. 난 점차 그의 손가락에 맞추어 갔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도 나의 흔적이 남았다. 내가 끼워있지 않을 때에도 이제 나의 흔적은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건, 약속의 징표였다. 나에게 숨을 불어준 건 그의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이었다.


선배들이 나에게 해준 말이 있었다.

“믿지 마. 힘든 날이 다가와도 이겨내야 해. 믿음을 잃지 마. 네가 믿음을 보여준 만큼 너에게 보답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 날이 오기까지는.


그 날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어느 오후, 예고도 없이.

무뚝뚝하게.


룸메이트가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그는 거칠게 날 손에서 뺐다. 난 유리 위에 놓여졌다. 그가 날 내려놓고 날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휴, 가볍게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그는 나를 서랍 안으로 넣어놓았다. 안에서 들으니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것이었다. 아니, 갑자기 여자가 어디서 나타났지? 초인종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아아아~~~ 으으으~~~.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져왔다. 이건 마치 악마의 소리처럼 불길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서 그는 손을 씻고 나와서 날 붙들고 기도를 했다. 그의 손에서 희미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비누향기였나. 죄악의 냄새였나.


처음이 어렵지 반복은 쉬웠다.


나는 점차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언젠가는 날 끼운 채로 하려다가 사정을 하는 직전에서야 문득 생각난 듯 날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고 성기를 주물럭댔다. 역겨운 놈이었다. 이런 놈에게 팔려오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미쳤었던 거다. 정말이지 내가 미쳤었다. 나는 그가 순결한 젊은이 인줄 알았다.


캠퍼스를 지나가다가 친구들을 만났다.


‘너도 당했니?’


모두들 조금씩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래놓고 교회에서는 경건한 척 노래를 부르겠지. 인간은 말과 행동이 다르고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우리 생각과 달라. 약속? 그럼 이 세상에 이혼한 사람들은 다 뭐게. 우리가 너무나 순진했던 거야.


그 날 밤 난 있는 힘껏 몸을 움직여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더 이상 그의 손에 머물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만약 당신이 잃어버린 반지나 액세서리가 있다면 어쩌면 그것들이 당신을 싫어해 떠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순결이라는 ‘상징’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니 반지가 순결이라는 잃으면 이 세상에 머물 의미도 없어진다.


부디, 첫 마음을 잃지 말아 달라. 이 인간들아.



이전 26화오늘 우리가 마주했던 떨림을 잊지 않기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