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직장동료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다.
둘 다 같은 직장을 다닐 때, 그 동료가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처음 보는 단톡방에 초대되었다. 단톡방에는 결혼하는 동료를 제외하고 4명의 다른 동료들이 있었다. 직장에서 만난 사이지만 다들 말도 놓고 친구처럼 지냈기에 일반적인 친구 모임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기피하기에 유일하게 말을 놓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과 사이가 좋았던 편이라 단톡방에 참여하게 된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갔을 때 그들은 이미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결혼하는 그 동료와 여행을 가려는 것 같았다. 프랑스 파리니, 슈트라스부르니, 독일 뮌헨이니 여러 익숙한 도시들이 후보로 거론되었고 최종적으로 프랑스 파리가 선정되었다. 나는 수동적으로 초대된 사람이라 결과에 토를 달지 않았지만, 당사자도 없는 단톡방에서 나머지 사람들 마음대로 장소를 정한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여행날짜에 급히 다른 일정이 생겨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단톡방에 양해를 구하고 당사자인 동료에게는 따로 연락을 했다.
"ㅇㅇ씨, 정말 미안한데 나는 그날 파리 못 갈 것 같아요. 같이 가면 참 좋을 텐데 일정을 못 바꿔서 어쩔 수가 없네요. 미안해요."
충분히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뭐야, 파리 가는 거 나는 모르는데 그걸 나한테 말하면 어떡해요? 다 망쳤네."
나는 문자를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당사자가 파리 가는 걸 모르다니? 근데 왜 '몰라야 한다는' 뉘앙스 같지? 그리고 뭘 망쳤다는 거지?
"파리인줄 몰랐어요? 근데 뭘 망쳤다는 얘기예요? 혹시 내가 꼭 가야 하는 자리인가요?"
미안하다는 답장에 다소 예의 없고 감정적인 답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모르는 게 있나 싶어 재차 물었다.
-"이거 브라이덜샤워인데. 바꾸라고 해야겠네."
브라이덜 샤워?
결혼을 앞둔 신부를 위해 친구들이 선물을 주고 축하해 주는 미국식 파티.
지금은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저 사건이 있던 시기는 한국에 브라이덜샤워가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브라이덜샤워를 하지 않았기에 그게 뭔지 몰랐다. 독일문화도 아닌지라 독일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Junggesellenabschied 총각파티, 줄여서 JGA라고 하는 비슷한 이벤트가 있는데 친구들과 주인공이 함께 시내를 돌며 소품을 판매하고 저녁엔 파티를 한다. 주말에 시내에서 총각파티를 하는 무리를 가끔 볼 수 있다).
그랬다. 주인공인 당사자 몰래 했어야 하는데 내가 발설해서 망쳤다는 뜻이었다.
"아, 브라이덜샤워가 뭔지 몰랐네요. 주인공이 몰라야하는 건가 봐요. 미안해요."
그리고 동료는 대답이 없었다.
사람이 다 내 맘 같지 않다더니, 딱 그 모양이었다.
상대방이 브라이덜샤워를 모를 거라는 가정을 한 번도 안 해봤을까? 그게 우리나라 문화도, 심지어 독일식도 아닌데 그걸 상대방이 알고 있어야 할 의무라도 있나? 계획에 차질이 없게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인데 '본인이 장소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토록 억울했을까? 어차피 여행을 가면 장소를 알게 될텐데..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나로서도 주워 담을 방법이 없었다. 개인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됐지만 오히려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약 3일 뒤 그 동료에게서 개인톡이 왔다.
-"내가 남자 친구(예비신랑)랑 얘기했는데, 남자 친구가 나보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브라이덜샤워를 모를 수도 있지, 화부터 냈던 내가 잘못한 거래요. 생각해 보니 그게 맞는 거 같아요. 그땐 내가 오해해서 미안했어요."
이것 역시 내 맘 같지 않았다.
나는 이전 톡으로 이미 동료와의 관계가 끝났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남자친구분의 역할로 나의 억울함 그리고 자칫 서먹해질 뻔 한 동료와의 관계가 풀어진 것이다. 그렇게 말해준 남자친구분도, 그걸 이해하고 사과문자를 보낸 동료에게도 참 고마웠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여전히 지금까지도 잘 지내고 있다.
인생 전체가 그렇듯, 사람과의 인연은 특히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참 많다.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인연은 도망가고 방치해 둔 인연이 어느새 소중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나는 파워J인 계획형 인간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막상 인생에서 계획대로 흘러갔던 일들은 거의 없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계획이란 '변경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기준점'일 뿐이다.
독자분들도 지난 인생을 돌아보시면 생각보다 직관적, 감정적으로 선택하여 벌어진 일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들은 쉬이 하지 못하는 유니크한 경험이 모여 나만의 인생 스토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안 되는 일이나 인연을 억지로 붙잡으려고 하지 말며, 반대로 잘 된다고 너무 안심하거나 그것에만 매달리지 않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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