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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Nov 02. 2023

독일생활 중 가장 현타 왔던 날

다신 겪고 싶지 않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의 독일생활 중, 심하게 현타가 왔던 날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이유는 외로움도, 공부량도, 동기가 내 과제주제를 빼앗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 날들엔 오히려 꿋꿋이 잘 버텨냈다. 하지만 그날은 정말 강렬하게 내 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니 이렇게 담담하게 적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과 시댁, 친정을 방문 후 기분 좋게 독일로 돌아오던 날이었다.


중국에서 바로 독일로 출발하여 하루 먼저 도착한 남편에게 급히 전화가 왔다. 집이 말도 아니라며 앉지도 못하고 정리 중이라고 했다. Wasserschaden(바써샤덴=수해, 물난리)이 난 것이다.


사건인즉, 당시 거주하던 우리 집은 한국식 2층(아랫집 있음)이었는데 아래층과 구조가 달라서 주방만 보면 우리 집이 1층이나 다름없었다. 건물 연식이 좀 있다 보니 수도관이 낡고 막혀서 위층의 모든 가정에서 흘러 보낸 폐수가 우리 집 주방에서 역류했다(식사 중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다). 몇 백 년짜리 건물도 보수해서 잘만 쓰는 게 독일인데 고작 30년 남짓 되던 건물이었으니 솔직히 그렇게 연식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배수관 어디선가 이미 문제가 발생했는데 관리회사가 덮어놓고 눈 가린 것 같았다.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갈 때도 어떻게든 집만 나가면 된다는 식의 행동을 보였는데,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남편과 나는 그렇게 짐도 풀지 못한 채 꼬박 4일 간 집을 청소했다. 주방이 거실과 연결되어 있어서 주방에서 흐른 폐수는 거실까지 흘러들어 가구도 망가뜨렸다. 결국 식탁, 소파를 버려야 했다. 집을 비운 후 언제부터 역류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깨끗한 물이 아니라 악취도 상당해서 마스크와 장갑을 껴야만 겨우 처리할 수 있었다. 와서 편히 쉬어야 하는 집이 그야말로 오물처리장이 된 것이다.




배관청소중인 모습. 거실 바닥과 몰딩, 벽까지 모두 망가졌다.


냄새를 빼느라 영하의 날씨에 하루종일 문을 열어둬야 했다. 사건 발생 후, 배수관 청소 전문 업체가 두 차례나 와서 관 내부의 찌든 때를 청소하는데 정말 새까만 것들이 한참 나왔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방치한 거야? 이사한 지 1년도 안 된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한국에서도 1층에 살아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이 정도로 건물관리가 안되다니, 돈에 눈이 먼 관리회사에 치가 떨렸다. 당시 그들은 우리의 전화도 수 차례 씹고 서로 책임 넘기기에 급급했다. 시간이 지나고 물이 마르며 나무바닥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 집은 월세전용이었기에 집주인과 직접 얘기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집주인이 존재하지만 관리회사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여 주인은 월세만 받고 세입자와 전혀 컨택하지 않는 집). 이대로 두면 잘못하면 뒤집어쓸 게 뻔했다. 건물 문제라는 게 명확하지만 발언에 힘을 보태줄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는 시내의 Mieterverein(세입자협회)에 가입하고 변호사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변호사는 법적 절차에 의한 컨택 방법과 반드시 들어가야 할 문장 등을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메일을 보낸 지 단 이틀 만에 관리회사의 답변이 왔다. 집 전체 건조 및 장판을 다시 해야 하는데 그동안 무료로 지낼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해주거나 월세를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건물 문제라는 것도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고, 일상을 다 망가뜨려 쉴 수 없는 집을 다시 고친다 한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곳이 되었다 (폐수 때문에 집 안 공기 전체가 나빠져서 침실 문을 항상 닫아뒀다. 덕분에 통풍도 안 되고 집안 어느 곳도 쾌적하지 않았다).


1년도 안되어 다시 이사를 준비하며 현타가 심하게 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여기서 남의 집 폐수까지 치우며 이 난리를 겪고 있을까.




이 사건이 가장 크고 강렬했지만, 나는 이 뒤에도 집에서 물난리를 두 번이나 더 겪었다 (다른 집들). 한 번은 신축 아파트에서 비만 오면 물이 새서 창가가 물바다가 되었고, 다른 한 번은 지하실 지대가 낮아서 창고 전체가 침수됐었다. 독일은 원체 비가 많이 오는 나라인데, 어째서 이런 대비 하나 없이 건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기 일 아니라는 식의 관리회사의 대처는 저혈압을 초고혈압으로 끌어올리는 주범이었다.


배수관도 마찬가지다. 물에 석회가 많고 가구수가 많은 건물이면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게 당연한데. 하긴, 당연한 걸 하지 않으니 그 사달이 난 거다. 모두가 일반 사람의 상식 내에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피해는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타국에서 물난리는 3번으로 족하다. 그만 겪고싶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본문 사진출처: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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