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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여행자 박동식 Feb 06. 2019

36. 호두를 보면서

2019.02.05


설 연휴 목표였던 테이블 정리는 무사히 끝났다. 당장 실천하려고 밤을 새웠다. 테이블 위에 있던 물건들을 어디론가 옮기려다 보니 방의 일부도 정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무언가 버리지 않고는 정리가 불가능했다. 큰 방의 구석 일부와 작은 방의 또 다른 구석 일부만 정리했는데도 버릴 것이 한 보따리였다. 무엇을 버렸는지 이곳에 구체적으로 공개하기는 곤란하다. 중요한 일도 아니다. 모든 것에는 필요한 시기가 있고, 때가 되면 그 필요성이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니까.


한 가지, 테이블에서 오래도록 잊고 있던 것이 발견되었다. 좁은 테이블 위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하긴, 새까맣게 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박스에 담긴 채 구석에 놓여 있던 것은 호두였다.


선물이었다. 아마도 1년은 넘었을 것이다. 지방에서 날아온 박스에는 호두가 담겨 있었고 친절하게 호두까기까지 들어 있었다. 호두만도 고마운 일이었는데, 호두까기까지라니.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사실, 호두까기는 그때 처음 보았다.


절반 정도는 먹고 잊었다. 그리고 가끔 생각이 나면 한 번씩 깨 먹었다. 그리고 몇 개월째 잊고 있다가 어제 테이블을 정리하며 새삼 발견한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고맙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꽤 여러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대접을 받을 때가 많다. 아마도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일 테다. 내가 작가가 아니었다면 인연이 되기 어려웠을 사람들. 무명작가(어쩌면 퇴물 작가)나 다름없는 나에게 그들이 보여주는 호의는 감사하고 때로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싫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받는 것에 익숙해진 삶.


평소,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을 싫어한다. 고마운 줄 모르고 늘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인연을 끊은 친구도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받는 '만큼'은 아니어도 받으면 갚는 것이 도리이고 이치다.


혹시 내가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호두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싫어하는 삶을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푼 것보다는 받은 것이 많은 건 맞다는 생각.


최근에 받은 선물 중에 하나가 핸드크림이다. 술자리 약속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양복 주머니에서 불쑥 핸드크림을 꺼냈다. 포장도 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지하철에서 약속 장소로 오는 사이 화장품 매장에서 구매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함께 캠핑을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감동적인 선물 중 하나는 독서대다. 나무로 만든 독서대가 아니고 철사로 만든 독서대. 그런 독서대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무렵 사라진 줄 알았다. 그는 납작한 비닐봉지에 담긴 독서대를 꺼내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교보문고를 한참이나 돌아다녔다고. 아직까지 그런 독서대가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교보문고에서 그런 독서대를 판매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작가이니, 책을 많이 읽을 것이고, 그러니 독서대가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착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선물이었다. 내가 그 선물에 감동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나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교보문고를 몇 바퀴나 돌면서 고민했다는 것. 교보문고를 돌면서 나를 생각해 준 시간이 그토록 고마울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순수함이었다. 몇 천 원에 불과한 독서대를 고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다. 술자리에서 불쑥 내미는 뜻밖의 선물과는 다른 상황이다. 나는 작가이고 그는 독자였으니까. 나라면 그놈의 알량한 체면 때문에 차마 몇 천 원짜리 독서대는 고르지 못했을 듯싶다.


공교롭게도 1~2년 후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다. 홍대였다. 수노래방 인근 빌딩이 공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빌딩이 올라가는 사이, 공사장 앞에는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는 그 가림막 앞에서 모자를 팔고 있었다. 그가 고단한 삶을 이겨보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전전했다는 이야기는 철사로 만든 독서대를 선물로 받은 날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사이, 그는 또 몇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 모자를 팔게 되었을까? 묻지도 않았다. 그는 매우 씩씩했다. 보고만 있어도 훈훈한 모습이었다. 반갑게 악수를 했고 유쾌하게 모자를 구입했다. 잘 쓰지도 않는 야구 모자였지만 내가 구입한 모자는 두 개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베푼다는 것은 마음이다.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보다 고마운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받는 것에 익숙함을 넘어서 당연시 여기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받는 것은 한 없이 고마운 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주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 보겠다고 다짐한다.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또 작은 것이라도 베풀며 사는 삶.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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