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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여행자 박동식 Feb 09. 2019

37. 그래도 다시 피어라

2019.02.08


지난해 추석부터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시발점은 형님이었다. 지난해 설에 형님이 빠졌고 누님과 내가 차례를 지냈다. 그다음은 내가 문제였다. 추석에도 형님이 빠졌고 나는 추석 당일 첫 고속버스를 타고 구미로 내려가 국토종주 자전거길 낙동강 구간을 달렸다. 그리고 올해 설에는 누님이 아예 해외여행을 가버렸다. 앞으로 차례는 지내지 않는 것으로 정착되거나, 지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콩가루 집안이라고. 사실 맞는 말이다.


설 당일에 하루 종일 집안에 있었다. 씻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까지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점심 무렵이 지날 때까지 빈둥빈둥이었다. 늦은 오후 서둘러 씻고 외출 준비를 했다.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은 후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갈 것인지 계획은 없었다. 그걸 결정하는 사이 저녁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무작정 서둘러 나온 이유였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두 가지로 압축했다. 방화동으로 가서 사진을 몇 장 찍는 것과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홍대쯤에서 만나 저녁을 겸함 술을 한 잔 하는 것. 방화동에서 사진을 찍겠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미였다. 오래전에 '고향을 그리다'라는 제목으로 몇 편을 썼던 그림 에세이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방화동을 서성이는 것 자체가 조금은 구질구질한 일 같았다. 오늘은 조금 더 활기차게 보내고 싶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연휴 마지막 날이니 휴식이 필요하거나 나름의 일정들이 있을 것 같았다.


으음, 어쩌지? 그러다 삼청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삼청동 모 카페에서 드로잉 전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청동도 걷고, 전시도 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삼청동에 도착해 밥부터 먹어야 했다. 저녁 식사에 가까운 매우 늦은 점심이었다. 마음에 드는 청국장 집은 문을 열지 않았다. 삼청동 한복판까지 들어가서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적당한 언저리 식당에서 돌솥비빔밥을 주문했다. 땅값 한다고 돌솥비빔밥 하나에 12,000원이나 했다. 평소 질퍽질퍽한 돌솥비빔밥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돌솥비빔밥보다 그냥 비빔밥을 선호한다. 대부분의 돌솥비빔밥들은 질퍽질퍽하니까. 이 집도 딱 그런 돌솥비빔밥이었다.


식후에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식당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물론 드로잉을 전시하는 카페로 가면 되겠지만 설 연휴라 카페가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고, 난 이미 내가 내려 온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썩 내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그래서 카페로 갔다. 카페는 열려 있었고 커피를 주문하고 드로잉을 감상했다. 배울 것이 많은 드로잉이었다. 나에게 적용하거나 참고할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림을 하나 그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안개꽃.


게을렀다. 한때 매일 그렸던 그림이지만 이제는 어쩌다 그리는 상황이 되었고, 8월에 시작한 철인3종은 늦가을에 열린 춘천마라톤을 미지막으로 쉬고 있다. 밴드에서 맡고 있는 카혼도 레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글도 써야 하고 사진도 더 열심히 찍어야 한다. 바빠서 못한 것들이 아니다. 게을러서 못한 것들이다. 분명 게을렀다. 하긴, 게을렀다는 이야기는 평생 뱉어야 할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다행이다. 새해가 두 번이나 있어서. 새해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수영장도 다시 등록하고, 그림도 매일 한 장씩 그리고, 카혼 레슨도 다시 받자. 집에는 택시가 아니라 대중교통으로 돌아오고, 아침 7시에는 기상하자.


그리고 또 한 가지, 내년 설에는 해외로 떠나자! 아주 멀리, 그리고 조금 길게. 혼자가 익숙한 사람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울에 남아서 설 연휴를 혼자 보내는 건 너무 허한 일이었다.





*누님이 여행 다녀오며 사온 선물. 절대 선물 사오지 말라고 항상 당부. 굳이 사올 거면 먹고 없어지는 거 사오라고 부탁. 내 부탁에 충실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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