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도서관 | 네 번째 이야기
도서관 산책을 오면 나는 1층에 있는 어린이실에 자주 들린다. 동시 읽는 것을 참으로 좋아해서 일부러 그곳을 찾기도 하지만,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붐비는 종합자료실이나 북카페에 마땅히 앉을자리가 없는 날에도 거길 찾는다. 서가와 등을 지고 앉는 어린이실 창가 구석자리는 평일에 거의 비어있어서 언제든 내가 차지할 수 있다. 한적하니 독서에 집중할 수 있고 글도 잘 써진다.
그런데 주말이나 방학 시즌에는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어린이실은 하루 종일 ‘조용하지만 활기찬’ 놀이터. 분명 도서관 어린이실은 책을 빌리고 읽는 공간. 하지만 천정까지 쭉 뻗은 나무 모양의 구조물 아래로 알록달록한 책들이 꽂혀있는 나지막한 서가와 동글동글한 테이블은 왠지 잡기 놀이나 숨바꼭질을 하고 싶게 만들고, 신발을 벗고 올라갈 수 있는 독서 구역은 뒹굴뒹굴하거나 양말을 신고 미끄럼을 타거나 이유 없이 뛰어다니기에 딱 좋아 보인다. 아이들은 조금씩 들떠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서관을 탐험한다. 에티켓을 지키려고 애쓰는 아이들 입가에서 큭큭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와 엄마랑 속닥거리는 소리, 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어린이실에서 어린이들만큼 어른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역시 그때다. 책을 사랑하고 책과 가깝게 지내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엄마들이 다정하게 혹은 반강제적으로(ㅎㅎ) 아이의 손을 붙잡고 도서관을 함께 찾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자기가 읽을 책을 척척 찾아와 한곳에 조용히 앉아 읽는 아이와 그 옆에서 함께 책을 읽는 엄마가 있는 반면(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겠죠?) 책에는 전혀 관심 없이 서가 사이를 계속 돌아다니거나 엉뚱한 장난을 치며 노는 아이, 그리고 그런 아이를 말리기 바쁜 엄마도 있다. 또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읽을 만한 책을 어찌어찌 고르긴 했는데 한숨을 푹푹 쉬면서 좀처럼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와 그 옆에서 스마트폰만 보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엄마도 있다. 얼른 집에 가자고 조르는 아이와 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줄 테니 몇 권만 더 읽다가 가자며 달래는 엄마, 책을 잔뜩 뽑아 들고 와서 폭풍처럼 읽어대는 아이와 아이가 다 읽은 책들을 제자리에 갖다 두기 바쁜 엄마 등등. 나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가끔씩 바라보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멍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많이 부러워한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내향적인 성격의 나는 유난히 육아를 힘들어했다. 마땅히 도와주는 사람 없이 어린 두 아이를 돌보느라 살림도 엉망진창이고 나도 엉망진창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는 ‘아빠 어디 가’라든지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같은 육아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었다. 또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처럼 베테랑 육아 전문가들이 나오는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검증되지 않은 어른들의 충고와 그다지 실용적이지 못했던 육아책만 있었다. 그래서 육아는 비록 힘들지만 행복하고 보람된 것임을 스스로 하나하나 깨우쳐 나가야 했던 초보 엄마는 늘 엉성하고 어설펐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특히 여름날의 육아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몇 곱절은 더 힘들었다.
육아 초반에는 우리 집에 아직 에어컨이 없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씨에 어린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놀고 여기저기 어지르면 나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했더랬다. 하루하루 무더위와 땀띠와 모기와의 전쟁이었던 기억뿐. ㅜㅜ 더위를 참고 아이들 밥을 챙겨주고 나면 입맛도 없었고,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 속에서 선풍기 바람에 의지해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나도 따라 지쳐 잠들기 일쑤였다. 그나마 에어컨 빵빵한 마트 같은 델 가면 얼마 동안은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 외출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그냥 포기할 때가 많았다. 도서관 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포기. 사다 놓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에 있는 책을 읽는 걸로 대체했었다.
너무 힘들면 그 힘든 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고들 하는데 그 시절의 육아가 나에게는 그랬다. 얼마나 힘들었냐면, 아이는 결국 자랄 테고 언젠가는 엄마의 손길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질 게 뻔한대도 그런 뻔한 일이 내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 앞으로는 혼자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거나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을 거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우울감에 빠져있었던 거다. 그렇다고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를 도로 뱃속에 집어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ㅎㅎ
하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지긋지긋한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어느 순간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찾아오듯, 여름 같았던 나의 육아도 어느 순간 선선하고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 찾아오려 한다. 아니, 찾아와 버렸다.
요즘은 저녁에 혼자 밥을 먹을 때가 많다. 큰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린다고 늦게 오고, 둘째 아이는 공부한다고 학원에 있고,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쁘고….
TV를 틀어놓고 안주 하나를 대충 만들어 시원한 맥주와 함께 혼자 저녁을 먹고 있으면, 평생 육아에 시달리다 늙어 죽을 것 같다면서 퇴근해 돌아온 남편을 붙잡고 찔찔 울던 과거의 내가 문득 떠오른다. 귀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고.
지나고 나니 마냥 소중하고 그리운 그때, 뜨거웠지만 눈부셨고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여름날의 추억들이다.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