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에 대한 영상을 봤다.
아무리 귀여운 새끼 돼지 사진을 봐도 내 안엔 돼지에 대한 묘한 불신이 있었는데, 그래서 돼지는 먹어도 되고 소는 먹으면 안 되는 동물이라는 이상한 기준도 있었는데, 어제 영상을 보고 그 본능적인 불쾌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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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동족을 잡아먹는 동물이었다. 무리에 아픈 돼지가 있으면 합심해서 그 돼지를 공격한 뒤 터진 배로 흘러나온 내장을 꺼내먹는다.
배가 왜 터지냐면, 돼지들이 코로 들이받는 힘이 굉장히 강해서 여러 번 받치면 내장만 파열되는 게 아니라 피부가 찢어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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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돼지는 동족만 먹는 게 아니었다. 사람도 잡아먹었다. 돼지 농장주는 절대 돼지 축사에서 넘어지면 안 된다고 했는데, 넘어지는 순간 돼지 떼가 달려들어 들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돼지보다 가죽이 약한 사람의 배는 더 쉽게 터진다. 간혹 돼지 축사에서 하반신이 없는 사람 사체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돼지들이 사람을 들이받고 내장도 먹고 살도 먹는 것이다. <한니발>의 마지막 장면이 단순히 상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먹고 교미하고 배설할 때 외에는 늘 화가 나 있는 돼지를 보면서 저것은 먹어도 되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탐욕스럽고 잔인한 욕망의 짐승. 얼마 전에 끌어 내려진 정치인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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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호숫가를 산책하는데 마주 오던 남자가 아내에게 “개소리 집어치워”라고 했다.
쳐다보니 배가 잔뜩 나온 40대 후반의 남자가 비쩍 마른 아내를 거의 길가로 밀다시피 걸으며 모욕을 주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남자는 내가 쳐다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눈을 뚫어지게 보면서 말을 이었다. “씨발 새끼가, 존나 떡치는 소리를 내는데, 떡을 존나게 치니까 내가….”
내가 약해 보이니 성적인 말들로 공격하는 것이다. 돼지였다. 사람 가죽을 쓴 수퇘지.
도시 생활이란 이런 짐승과도 함께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머릿속으로 수퇘지의 얼굴을 난도질하는 상상을 하며 화를 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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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집요한 시선이 느껴져서 쳐다보니 아까 그 수퇘지가 건너편에서 팔을 허리춤에 올려놓고 내 쪽을 향해 선 채로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폼을 보니 한참 전부터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아까 지나친 후로 내가 이 길을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을 수도. 그렇게 그는 길 한 가운데 서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시발 인간도 아닌 게.
나는 몹시 화가 나서 가방에서 미스터 구텐탁씨를 꺼냈다. 개천의 폭이 고작 1미터 정도였고, 물도 말라 있어서 남자가 개천을 건너 내 뒤를 쫓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의 공격을 준비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내가 달려들어 잽싸게 눈을 찌르는 걸 막을 수도 없고, 내가 도망치는 것을 쫓아올 수도 없어. 너는 살진 돼지고 나는 전보다 더 빠르고 세졌으니까.
누가 잡아먹히나 해 보자, 라고 생각하며 홱 뒤를 돌아봤다. 그는 없었다. 그가 쫓아올 수 있도록 천천히 간 후에 다시 홱하고 돌아봤다. 이번에도 없었다. 그렇게 세 번을 돌아봤지만 그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 쇼한 것이다. 다행이었다. 별로 감방에 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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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돼지가 많고, 돼지는 먹어도 되는 동물이다. 반면 소는 먹으면 안 되는 동물 같다. 눈이 선량하고 울음소리가 너무 구슬프니까.
나는 소띠다. 어제 마흔이 됐다. 자정을 지나자마자 들숨에 마, 날숨에 흔, 소리가 들렸다. 걸을 때도 왼발에 마, 오른발에 흔, 소리가 났다. 마.흔.마.흔.마.흔...
마흔엔 소는 안 먹고 돼지만 먹기로 했다. 그게 내 마흔 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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