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센세이셔널한 붐을 일으킨 때가 있었다.
당시 겨우 학생이었던 주제에 영혼을 다치면 얼마나 다쳤다고 그 책에 몰두해 몇날 몇일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궁금했다. 닭고기 수프라는 음식이 정말 이리도 따뜻하고 효과적인 치유제인지, 우리네 닭죽이나 닭곰탕과는 아예 다른 음식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결혼 초 나는 자주 아팠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아팠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도 모르고 혼자 끙끙 앓았었다.
열이 39도를 넘나들고 목구멍은 까슬하고 온 몸이 두드려 맞은듯 아팠지만 병원을 가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문득 어릴 적 읽었던 책이 생각났고 나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뚱이를 일으켜 힘겹게 당근이며 감자를 썰고 닭고기를 손질해 생크림을 넣은 치킨 스튜를 만들었다.
맛은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자주 앓았다.
내 힘듦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듯 모를듯 그러나 차마 직면할 용기도 헤쳐나갈 자신도 없었기에 그저 혼자 아프길 택했다.
그리고 지금.
그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아프다.
스스로가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가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내 비참한 삶에 마지막 동앗줄이라 생각했던 존재도 결국 나를 이용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이 생에 바라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집 앞 자주 무심히 지나치던 갈비탕집.
물에 빠진 고기를 못 먹는다는 이유로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갈비탕에 소주를 곁들여 몇 끼를 때웠다.
효과는 놀라웠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따위 코쟁이 서양인들이나 쳐먹으라지.
나같은 한국인한테는 갈비탕에 소주가 진리였다.
매일 매순간 매분 매초 죽고싶은 마음이 뜨끈한 갈비탕에 소주 한 잔 먹고 나면 그래 될대로 되라지, 어떻게든 되라지 느긋하게 풀어진다.
나도 안다.
마치 마약처럼 이런 위안도 이 순간 뿐이라는 걸.
그래도 하루 종일 죽고 싶은 마음만으로 죽지 못해 사느니 하루에 두 시간 정도라도 뜨거운 갈비탕의 위로를 받는 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언젠간 이런 방식의 휘발성 위로에도 지칠 것이고 여러 상황을 겪으며 말도 안되게 작아진 나의 위가 이제 그만하라며 먹었던 걸 다 토해낼 순간이 오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나는 이 값싼 위로에 의지할 밖에 도리가 없다.
이젠 정말 그 밖에 나를 위로할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