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본 구급상자
잠자기 좋은 계절이라 재하는 매일 늦잠을 잔다. 깼다 다시 자는 기술도 늘었다. 슬쩍 눈 떠서 상태 보고 다시 잔다. 아직 시계 보지 못하지만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를 보고 아는지 이쯤 일어나면 아빠가 어린이집을 안 보내는 경계선 즈음에 일어난다. 하지만 나도 3년쯤 애를 보다 보니 악에 받혀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씻기고 입혀서 열 시 반쯤 어린이집 문 앞에 다다른다. 치고 박은 흔적이 곳곳에 남은 초췌한 부녀를 보고 원장님은 늘 말씀하신다.
「우리 재하 푹 자고 왔어?」
일어나는 분위기는 늘 천차만별이다. 아무래도 꿈 때문인 것 같다. 만 3~4세 즈음이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때라는데 꿈에서 잘 놀았으면 기분 좋게 일어나는 것이고 좀 서운하게 했으면 일어나자마자 울고불고 꼬장을 부리며 보복을 한다. 무슨 꿈 꿨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엄마아빠를 포함한 친인척 관련 내용이다.
「재하야, 꿈에 뽀로로는 안 나와?」
「뽀로로가 티비에서 어떻게 나와아!!」
꿈 관련된 것으로는 재하의 큰 이모가 가장 큰 피해자이다. 조카의 꿈속에 종종 악역으로 나오는 모양이다. 한 번은 재하가 일어나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자기 딸기 우유를 이모가 먹었다는 것이었다. 이모는 평생 입에도 대보지 않은 딸기우유 덕분에 다짜고짜 아침부터 욕을 먹었다. 또 이번에는 재하가 자고 일어나더니, 두 개 있었던 자기 구급상자 세트를 이모가 하나 가져갔다고 했다. 사실 원래 재하 구급상자는 하나뿐인데 어디서 뭘 봤는지 꿈자리에서 하나 더 늘려와 이모에게 누명을 씌워버렸다. 하도 뭐라 뭐라 하니 조카에게 약한 이모는 해명보다 지갑을 열었다. 빠른 배송으로 병원놀이가 날아왔다. 그리고 그걸 본 재하는 이모가 간밤에 가져간 구급세트가 맞다고 했다. 재하는 꿈에서 구급상자를 양손에 하나씩 가질 자신을 먼저 본 모양이다. 예지몽이 따로 없었다.
성경 「다니엘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악몽을 꾼다. 기분이 안 좋아진 왕은 사제, 무당, 학자 등등을 불러다 자기가 꾼 꿈이 무슨 의미냐며 묻는다. 문제는 지도 무슨 꿈 꿨는지 기억 못 하면서 그랬다. 당연히 꿈 전문가들도 뭔지 대강이나마 들어봐야 썰이라도 좀 풀 수 있었을 터였다. 물론 「다니엘서」인 만큼 주인공 다니엘이 짜잔 하고 나타나 왕의 꿈을 보지도 않고 해몽해 영웅이 된다. 그렇지만 신에게 선택받지 못했던 소시민 점쟁이들은 그것도 못 맞추고 월급 받냐며 욕만 먹고 감방에 갇히게 된다. 그동안 살면서 이 엑스트라들에게 관심도 없었건만 이모를 잡는 우리 딸을 보니 종교를 가진 지 어언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그 점쟁이들의 억울함이 공감되었다. 뭐 어찌 되었건 이제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경험했으니 앞으로가 좀 걱정되긴 한다. 꿈에서 어린이집 다녀왔다고 안 가도 된다고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덩달아 나도 애 키우다 보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꿈에서도 딸내미 시중드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하다. 장점은 하나 있다. 이제 군대 꿈은 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