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0. 3차원으로 바라보기;

by 그리울너머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 뒷자리에 앉은 중년의 아저씨가 신경에 계속 쓰였다. 비록 몇 없는 승객 중 한 명이었지만, 풍겨오는 술 냄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마음을 흩트려 놓았다. 그러는 와중에 별안간 그 아저씨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는 까탈스럽게도 아저씨의 큰 목소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나 보다. 집에 가까워지기는 한참 멀었지만, 내심 까탈스러웠던 마음이 미소로 번진다.


“잘 지내지?”


안부 인사로 시작해, 어쩐 일로 전화했냐는 수화기 속 너머의 여인의 물음에 아저씨는 “오늘 네 생일이자나”라며 흥겨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늘어놓는 추억의 어디쯤. 생일 축하한다며, 연락이 뜸해져 연락하기가 주춤하더라도 생일을 핑계 삼아 전화할 수 있다는 게 좋다는 아저씨.


“나 옛날에 너 많이 좋아했잖아, 우리 아직 친구지?”


멋쩍게 한마디 내뱉고는 웃어넘긴다.


“우리 옛날처럼 술도 한잔 하고, 국밥도 한 그릇 먹자.”

“보고 싶다 친구야”


친구라는 이름을 핑계 삼아, 생일을 핑계 삼아, 옛 추억을 핑계 삼아, 아저씨는 그렇게 아직도 사랑 고백 중인가보다. 아직도 사랑고백하는 아저씨가, 조금은 측은해 보이다가도, 늘어놓는 추억의 어디쯤에는 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연락이 뜨물 해져 잊힌 어딘가에도, 늘어놓은 추억처럼 나는 있다. 나는, 아직, 네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

친구라는 사이는 가끔은 그런 것, 나는 일 년에 한 번 다가올 너의 생일이 기다려진다면, 또 다른 설렘 행복이겠다. 그래서 너의 생일이 기다려진다면, 그건 또 다른 거짓말이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풍겨오는 술 냄새에 중년의 아저씨가 생일 축하한다며, 아직 잊지 못한 첫사랑을 고백하듯.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다가올 너의 생일이 기다려진다면, 너에게 연락할 이유를 만들고, 핑계를 둘러대고, 대부분은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찾다가 그러다 말았지. 용기가 없어서일까라고 생각했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당신과의 만남은 그다지 특별할 필요도, 중요할 필요도, 의미를 찾을 필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아직 너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


해외여행을 나섰을 때, 낯선 어딘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 상황과 순간은 시시때때로 바뀐다. 그럴 때마다, 그 어디쯤의 설렘, 좋은 느낌.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지. 말마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다. 노력할 필요도, 용기 내어볼 필요도. 연락 한번 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리움은 늘 조용히 남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생일이라는 작은 기념일을 통해 다시금 떠오르는 기억들은 우리의 삶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한때의 설렘과 아련한 감정, 그리고 미소 짓게 만드는 소소한 대화들이 서로에게 닿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잊지 못할 인연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 기억들이 쌓여, 우리 사이의 진솔한 이야기가 되어 오늘도 조용히 빛나고 있다.



친구라는 사이가 가끔은,

어쩔 때에는, 혹은 매번.


연락이 뜨물 해져, 어색해질 때가 있지,

그래서 너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가.


한 달 두 달 그리고 일 년이 지나,

너의 생일이 다시 다가오더라.


그때 다시 네가 생각나면,

핑계 삼아 전화 한 통 걸 수 있겠지.


그렇게 이 핑계 저 핑계 삼아,

너를 만날 소일거리를 생각했다가도.


그냥 그러다 말겠지,


그래서 나는 일 년에 한 번 다가올 너의 생일이 기다려진다면,

그건 나에게 또 다른 설렘 행복이겠다.


그래서 너의 생일이 기다려진다면,

그건 또 다른 거짓말이겠다.




우린 술 한 병을 천천히 마신 적 없었지. 한 병, 두 병을 마시다 보면 우리의 시간은 멈추고 주변의 부산스러운 소음 속에 스며들곤 했다. 그냥 그 모든 것이 재밌었고, 너는 늘 네 멋대로 우당탕탕 움직이며, 나는 그런 너 앞에서 어리숙한 어린아이처럼 웃고 떠들곤 했다. 그렇게 대소동이 지나면 “저녁 먹자, 술 한 잔 하자, 커피 마시자”는 말이 오갔고, 너는 때로는 불쑥 나타났다가 고요한 강물처럼 사라지곤 했다.

거센 파도처럼 다시 다가올 너를 기다리는 시간,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가끔 바다가 그리워지고 바다를 닮은 너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비 오는 날 학교 앞에서 누군가 내게 우산을 들고 기다려줄까 하는 두근거림에 기대를 품던 순간처럼, 너와 함께했던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평생 한 번 볼 수 있을까 하는 개기일식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 믿으면서도, 너와의 시간은 늘 좋았다. 그러면서도 쓸쓸함은 남아있다. 나는 항상 너랑 놀면 재밌고, 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며 장난치고 싶기도 했지만, 때로는 너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우당탕탕 내리는 소나기가 지나간 뒤, 닿을 수 없는 무지개를 바라보듯 나는 그 시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지켜보다가 문득 새우잠에 빠진 나를 발견하면,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꿈만 같아지곤 했다. 행복에 기준을 세우려 하면 오히려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저 그때 그 시절의 소소한 기쁨에 머무르고 싶었다. 만약 행복하기 위해 너를 만난 것이라면, 그것은 불행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행복의 기준을 세우려 노력하면, 결국 덜 불행해지기 위한 애쓰는 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지금의 하루에 만족하지 못할 때마다 느낀다. 우리의 일상 속 소중했던 기억들을 다시 돌아보며, 나는 너를 만나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싶다.

이제 너를 애증 하거나 그리워하지 않겠지, 창문을 두드리며 내일 해가 뜰 거라 믿었고, 열리지 않는 문에 소리쳤다. 먹구름 낀 하늘 아래 요란한 천둥소리와 비가 내리자, 마치 잊힌 감정들이 씻겨 내려가듯 구름이 걷히고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심기가 불편한 오후가 지나고, 저녁 바람에 졸음이 몰려올 때,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고요한 빗소리가 아우성치듯 들려왔다. 비도 내리고 해도 떴겠지. 어쩌면 내일도 해는 뜰 테지만, 거세지는 빗줄기에 창문을 두드리며 하늘을 열어달라고 외쳤다. 그 틈 사이로 스며든 한 줄기 빛에, 오늘은 곤히 잠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알람 소리 없이 “5분만 더…” 속삭이며 눈을 뜨는 아침,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마다 나는 그 시절을 회상한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변치 않는 설렘처럼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벚꽃이 주는 기쁨보다 더 소중한 것은 너와 나눈 진솔한 이야기들이다. 오늘의 하루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덜 행복하다고 투덜거릴지라도, 그 모든 순간이 결국 우리를 이루는 한 조각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해가 짧아지면 가을이 온다고들 했다. 해가 길어지는 계절은 네 계절이라고 했지만, 내 계절은 해가 짧아진 후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그 중간, 모든 계절이 공존하는 순간이 좋았다. 억새 꽃이 오늘의 노을빛처럼 불그스레 빛날 때, 너는 마치 그 꽃처럼 내게 다가왔었다. 갈대보다 억새가 좋은 이유는 산 중턱까지 오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고, 너는 늘 산을 더 좋아했기에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노을 지는 억새 밭에서 너와 함께했던 추억만은 소중하다.


결국,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불꽃처럼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다시 찾을 봄을 기다린다. 차가운 바람과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이 내게 말하듯, 행복했던 순간과 아픈 이별이 공존하지만, 나는 이제 너를 애증 하거나 그리워하지 않고, 지난 기억 속에서 미소 지을 뿐이다.

행복했고,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하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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