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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영이와 현수 (7)

화장실에 간 엄마는 이번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현수는 별일이야 없겠지 하면서도 마음한편이 불안했다.

엄마는 여행 내내 한시도 놓지 않던 휴대폰까지 두고 갔다. 자리에 걸쳐둔 엄마의 외투 안에서 짧은 진동이 여러 번 울렸다. 엄마에게 연락이 올 데는 빤했다. 급한 연락이면 전화를 걸겠지 하고 넘어가자니 진동은 반복되면서 주기도 점차 짧아졌다. 현수의 불안은 점차 커졌다. 진동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수는 벌떡 일어나 엄마 자리로 다가갔다. 휴대폰을 핑계로 화장실에 가서 엄마의 안전을 확인할 심산이었다. 휴대폰은 엄마의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귀퉁이가 삐죽 밖으로 튀어나와있었다. 외투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막 꺼냈을 때였다. 손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한 건 결코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액정에 떠오른 메시지에 반사적으로 눈이 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 본 순간 현수는 멈출 수 없었다. 엄마의 휴대폰에는 비밀번호도 걸려있지 않았다.


영이는 변기에 앉아 일단 코부터 풀었다. 얼얼할 정도로 시원하게 풀고 나자 이제는 눈이 시큰거렸다. 지난밤 전송된 현수의 생각데이터가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혼자서 모든 책임을 안고 살아온 영이에게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영이의 잘못된 결정은 현수의 잘못된 인생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것 같았다. 예상되는 결과가 가장 좋은 쪽으로 현수를 몰아붙인 건 결국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직장에서 안정된 삶을 살면 더 행복하리라는 건 돌이켜보니 영이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가령 빵으로 유명한 프랑스로 유학을 보낼 형편만 되었다면 현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근사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딸의 미래를 생각해서 반대하는 척 했지만 사실은 제대로 해내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도 가늠이 안 되는 그 길을 같이 걸을 자신이 없어서 처음부터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근사한 길이 아닐지라도 현수에게는 그 길이 나았을지 모른다. 동네 빵집에서 일하며 평범해 보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게 뒀다면 지금보다 행복했을지도. 착하디착한 딸이 꾹꾹 눌러둔 마음의 크기를 이제야 제대로 깨달은 게 미안해서 자꾸 눈물이 났다. 영이는 코를 닦았던 휴지를 접어 눈물을 훔쳤다.


현수가 직장을 관두고 본격적으로 빵을 배우려면 영이는 이제 뭘 해야 할까. 얼마 전까지도 시장 일에 노련한 영이에게 도와달라고 연락해 오는 젊은 사장들이 있었다. 바쁜 오후에 서너 시간씩만 일해도 월 백 정도는 거뜬히 벌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오십은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오십은 저축하면 현수가 언젠가 작은 빵집을 열 때 조금이나마 보탤 수도 있을 테다. 다만 사장들이 영이 귀가 예전만큼 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도 써 줄지는 자신이 없었다.

일단 현수에게는 다시 시장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현수가 새로운 일을 마음 편히 시작할 수 있게. 정 안되면 설거지라도 하면 된다. 그래, 설거지. 딱히 대화가 필요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하는 일이니 앉았다 일어섰다 사람들을 대하는 일보다 무릎에도 나을 것이다. 나름의 계산을 끝내고나니 다시 현수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영이는 눈언저리를 찬물로 씻어낸 후 화장실에서 나왔다.


현수는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느라 영이가 돌아온 지도 몰랐다. 장난기가 발동한 영이가 슬쩍 현수의 등 뒤로 가 어깨에 두 손을 턱 얹으려할 때였다.


“엄마, 귀가 안 들려?”


현수가 고개를 홱 돌리며 따져 물었다. 눈시울이 빨갰다.

영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현수 손에 들린 건 영이 휴대폰이었다. 화면에 모자로부터 전송된 걸로 보이는 메시지창이 떠 있었다.


“다 봤어. 엄마 일기.”

“일기라니. 그런 건 써 본 적이 없는데.”


영이가 현수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듯 가져왔다. 화면에는 그새 새로운 메시지가 떠 있었다.


- 일기라니. 그런 건 써 본 적이 없는데.


이럴 리가 없었다. 오늘 아침 화장대에는 두 개의 모자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나갈 채비를 마친 영이가 먼저 모자를 썼고, 남은 하나는 결국 현수 가방으로 들어갔다. 카드키 분실사건으로 화가 난 현수가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집어 제 가방에 푹 찔러 넣는 걸 영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현수가 모자를 쓰지 않았으니 오늘은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전송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외투 주머니에 넣고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메시지는 계속 전송되고 있었다. 그것도 현수가 아닌 영이의 생각이. 

현수와 영이의 모자가 바뀐 모양이었다. 영이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 순간에도 영이 손에 들린 휴대폰은 부르르 떨렸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영이의 머릿속 생각들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떠오르는 중이었다. 다행히 현수는 전송된 메시지를 엄마의 ‘일기’ 정도로 여기는 듯 보였다. 영이는 화장실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곱씹어보았다. 현수가 그 마음을 어디까지 들여다봤을까. 불안했다.


“너는 왜 엄마 휴대폰을 보니?”

“말 돌리지 말고 얘기해. 엄마 귀가 어떤데?”

“어떻긴. 지금 너 하는 말도 잘 듣고 있잖아.”

영이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현수 입모양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말했다.

“다 봤다니까? 귀가 예전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엄마가 쓴 일기.”

“일기 같은 거 쓴 적도 없다는데 얘가 자꾸 이상한 소릴 하네.”


차라리 인정하고 넘어가는 편이 나을 뻔했다. 현수가 조금 전 읽은 일기를 다시 보겠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영이는 일단 모자부터 벗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자를 벗자 더 이상의 진동은 없었다. 딸에게 경계심을 풀라는 의미로 모자 옆에 휴대폰도 나란히 두었다. 실수였다. 현수가 그 짧은 틈을 타 휴대폰을 홱 낚아채버렸다.


“이게 뭐야? 일단 모자부터 벗어?”


현수가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곧이어 현수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모자로 향했다. 현수는 모자를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집더니 머리에 썼다. 말릴 틈도 없었다. 현수가 쥔 휴대폰의 진동이 영이에게까지 느껴졌다. 화면을 뚫어지게 보던 현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모자, 도대체 뭐야?”

“뭐긴. 너랑 같이 쓰려고 산 모자지. 제주도는 바람이 많다고 그래서. 그 뭐냐, 유튜브에서.”

유튜브 얘기로 분위기를 가볍게 돌려보려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바람이나 막는 모자가 아니잖아. 엄마 혹시 요즘 깜빡깜빡해?”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현수의 두 눈에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빨간 핏줄이 불거졌다.

“대답해 봐.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스스로 기억을 못하는 거야? 그래서 엄마 머리를 스쳐간 건 뭐든 기록해주는 이런 모자가 필요한 거야?”

목소리에 섞인 울음기 때문에 영이는 현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더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현수는 지금 영이를 치매 또는 그 비슷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이에게는 이제 앞뒤사정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겁에 질린 현수를 달래주는 게 제일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기억력을 잃는 것에 비하면 청력을 잃어가는 편이 차라리 낫다.


“딸,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엄마 기억력 아직 멀쩡해.”

“그럼 이 모자는 대체 뭔데.”

“이 모자는 사실 엄마가 쓰려던 게 아니고......”

“엄마가 쓰려던 게 아니면?”

영이가 육십대 후반의 속도로 대답을 준비하는 사이, 현수는 삼십대의 속도로 먼저 상황을 짐작해버렸다.

“혹시...... 이 모자...... 내 꺼야?”

현수의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

“아니지? 내가 어제 쓰고 다닌 모자...... 이거 아니지?”

“......”

“맞구나?”

“......”

“하, 엄마는 정말...... 여전히 날 엄마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구나?”

쏘아붙이는 말투보다 영이를 당황하게 만든 건 현수가 내뱉은 단어였다.

“소유물이라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난 그냥 네 말을 놓칠까봐......”

“변명하지 마! 엄마는 전부터 그랬잖아.”


카운터 뒤에 앉아있던 사장이 조용히 나와 가게 출입문을 잠그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현수는 이제 이마에까지 파란 핏대가 솟았다.

“내 일기장 훔쳐보는 게 엄마 취미였잖아.”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나쁜 일을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돼 책상에 놓인 일기장을 열어본 적이 있었다. 별일 없이 지내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놓여서 그 뒤에도 두어 번 더 본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그걸 알았구나.”

“엄마만 날 아는 게 아니니까. 근데 엄마 그건 몰랐지?”

영이는 현수의 차가운 표정이 낯설고 두려웠다. 현수의 말을 놓칠까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엄마가 본 일기들 다 가짜였어. 엄마 보라고 쓴 거야. 진짜는 꽁꽁 숨겨뒀어. 근데 이번엔 다 들켰네. 엄마가 머릿속까지 들여다볼 거라곤 상상도 못해서.”

현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탑승시간이 세 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현수의 얼굴은 빨간 신호등 앞에서도 정면만 향하고 있었다. 영이는 더 이상 딸의 표정과 입모양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놓치는 말은 없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을 거쳐 비행기를 타고 다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현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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