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패딩에 백팩을 멘 손님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님은 진열대에 놓인 모자를 꽤 오래, 말없이 둘러봤다.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마침내 진열대로부터 돌아선 손님이 메고 있던 백팩을 벗어 테이블에 툭 올렸다. 여행용 백팩이었다. 손님은 불룩한 가방 안으로 손을 깊숙이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동그란 창이 있고 꽃모양 자수가 새겨진 자줏빛 누빔모자. 그 순간 처음 보는 손님의 얼굴이 낯익은 이유를 깨달았다. 손님은 며칠 전 다녀간 할머니의 딸이었다.
할머니는 누빔모자를 딸과 커플모자로 쓰고 싶다고 하셨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할머니 대신 모자가 딸의 목소리를 전해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손님, 이 모자는 보청기가 아니에요.”
모자의 도움으로 몇 마디쯤이야 이어갈 수 있겠지만, 결국 들통이 날 거라고 말씀드렸다. 딸도 금방 눈치를 챌 게 분명했다. 게다가 모자를 누군가에게 주려면 상대방에게 모자의 비밀을 알리고 동의를 얻어야했다. 딸이 걱정할까봐 보청기 대신 모자를 쓰려는 할머니가 모자의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리 없었다. 할머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평소였다면 이미 가게를 나갔을 사장님이 어쩐 일인지 입구를 서성이다가 불쑥 할머니 앞을 막아섰다. 손에는 아직 마음을 읽는 기능이 적용되지 않은 모자가 들려있었다. 진열장에 놓인 것과 같은 모양의 자줏빛 누빔모자였다. 사장님은 단호하게 거절하려고 막 입을 여는 날 향해 고개를 저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알잖아요. 금방 들통날거에요. 잠깐이라도 마음 편히 여행하시게 도와드려요, 우리.’
나는 할머니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전송되도록 설정해드렸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에 연락처도 알려드렸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이제 할머니가 모자의 비밀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다녀오기만을 바라야했다. 여행 초반에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다행히 금방 해결되었다.
뜻밖에도 메시지는 제법 오래 전송되었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모자의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싹틀 무렵,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jini_03 때처럼 생체신호가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거다. 모자의 사용자가 달라졌다는 의미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생체신호가 다시 달라졌다.
- 이 모자, 도대체 뭐야?
모자로부터 전송된 마지막 메시지였다. 정황상 첫날의 사용자는 딸, 이튿날의 사용자는 할머니였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는 다시 딸. 메시지의 내용으로 보아 할머니는 딸에게 모자의 정체를 들켜버린 게 분명해보였다.
모자에 대해 알았을 때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화가 났을 것 같다. 딸의 마음을 허락도 없이 읽는 엄마에게는 물론 그 모자를 만든 가게에도 따지고 싶었을 테다. 나는 할머니와 공범이라는 죄책감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손님이 꺼내놓은 모자가 보였다. 모자는 하나다. 어? 할머니가 가져간 건 분명히 두 개였는데.
“하나는 아직 엄마가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손님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화를 내든 따져 묻든 잠자코 듣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중이었다.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인 후 손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화도 아니고 따져 묻는 말도 아니었다.
“전송된 메시지, 좀 볼 수 있을까요?”
“전송된 메시지요?”
“엄마는 그 모자를 계속 쓰고 계실 테니까요.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모자는 지금도 엄마의 생각을 엄마 휴대폰으로 보내고 있겠죠. 여기서는 그걸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 오셨어요?”
손님이 민망한 듯 고개를 내리깔았다.
“사실 엄마 휴대폰에 앱을 하나 깔아뒀어요.”
손님이 할머니 폰에 설치한 건 위치추적앱이라고 했다. 자꾸 깜빡깜빡하는 엄마가 혹시 길이라도 잃을까봐 설치해두었다고. 가게에 들어와서도 손님은 수시로 지도를 띄워 할머니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생각데이터를 보시려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요?”
“엄마는 괜찮다고 하지만 전 솔직히 불안해요. 그날 호텔에서도 그랬거든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자기 손으로 치운 카드키를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그 작은 호텔방에서 그걸 잊어버린 거예요. 우리 엄마...... 귀가 안 좋아요. 청력이 기억력에도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손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손님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 슬쩍 노트북 화면에 프로그램을 띄우고 jini_37 폴더를 넣었다. 생각데이터에서 정말로 할머니의 기억력에 관한 문제가 드러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만약 그렇더라도 손님에게 어머니의 생각데이터를 보여줄지 말지는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할머니는 딸이 이곳에 찾아온 것도 모르실 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결정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앞에 앉은 손님의 생각데이터가 전송된 이후로 더 전송된 데이터는 없었다. 나는 화면을 돌려 마지막 메시지 이후 텅 비어있는 창을 보여드렸다.
“여행이 끝나고는 어머니께서도 모자를 안 쓰셨나 봐요.”
“그래요?”
손님이 화면을 가만히 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앞에 놓인 마우스를 빼앗듯 가져갔다.
“제가 한번 볼게요.”
말릴 틈도 없었다. 손님이 빠른 속도로 스크롤을 올리기 시작했다.
- 이 모자, 도대체 뭐야?
가장 최근에 전송된 생각부터 차례로, 마치 되감기하듯 데이터가 나타났다. 손님은 이미 다 읽어 다시 볼 필요가 없는 듯 스크롤을 올렸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빠르게 움직이던 손님의 손이 느려졌다.
- 사장들이 내 귀가 예전만큼 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도 나를 써 줄까.
손님이 침을 삼켰다. 손님의 눈시울은 파르르 떨렸다.
- 근사한 길이 아닐지라도 현수에게는 그 길이 나았을지 모른다.
손님의 눈에 이번에는 눈물이 맺혔다. 여기서부터는 손님도 읽은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손님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아주 천천히, 공들여 메시지를 읽었다.
- 좋은 직장에서 안정된 삶을 살면 더 행복하리라는 건 내 일방적인 생각이었어.
- 현수를 몰아붙인 건 결국 내가 두려워서야.
- 내가 잘못 결정하면 현수의 인생도 잘못될 것 같아서.
손님 눈에서 동그란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눈물은 손님이 쥐고 있던 마우스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번졌다. 들켜선 안 될 감정을 들킨 데 당황한 듯 손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사이 테이블 위에 있던 손님의 가방이 넘어졌다. 열린 입구로 내용물 몇 가지가 쏟아졌다. 나는 몸을 숙여 손님이 물건을 챙기는 걸 도왔다. 식빵이 그려진 책 한 권, 한라봉 모양의 동전지갑 두 개, 검정색 파우치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운 건 직사각형 모양의 카드였다. 남색바탕에 은색으로 새겨진 건 호텔 이름이었다.
“하......”
내 손에서 물건을 받아들던 손님의 손이 카드 앞에서 정지했다. 카드를 받아드는 손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모자를 반납하러 온 건 다음날 저녁이었다. 할머니는 노란색 크로스백을 메고 오셨다. 크로스백 한쪽 고리에 동전지갑이 달려있었다. 전날 손님의 가방에서 쏟아졌던 것과 같은 한라봉 동전지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