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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영이와 현수 (6)

제주에서는 어딜 가든 사람이 많았다. 식당마다 빈자리가 없어 줄을 섰고 호텔 로비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으며 아이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시장에서 일할 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만 봐도 배가 불렀는데 이제는 조금 버거웠다. 무엇보다 딸의 목소리가 주변의 소란에 섞여들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신경을 더욱 바짝 곤두세워야했다. 모자는 기대했던 것만큼 대화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영이가 평소와 달리 내내 휴대폰만 보는 걸 딸이 이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모자 대신 대화를 도운 건 표정이었다. 딸은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영이는 남들이 모르는 아주 작은 변화까지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딸이 하는 말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질문인지 짜증인지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딸이 반복하는 단골멘트는 눈빛만 봐도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시집은 무슨 시집이냐며 자기는 평생 혼자 살 거라는 투정, 엄마는 왜 조금밖에 못 먹느냐는 잔소리, 늙은 엄마가 안타까운지 저 보기에 좋아 보이는 건 뭐든 권하는 말까지.

그렇다고 모자가 영 쓸모없었던 건 아니다. 딸이 꽁꽁 숨겨둔 속마음을 들여다보기에는 제법 유용했다. 이 카페에 온 것도 사실은 어제저녁에 모자가 딸의 마음을 읽어준 덕분이었다.


카페는 돌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커다란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자 고소한 빵 냄새가 영이를 에워쌌다.

빵 냄새에는 사람의 발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래선지 시장 입구에는 으레 빵집이 있었다. 영이가 30년간 일한 시장 입구에도 튀김소보로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 사장은 영이보다 예닐곱 어린 여자였는데 새벽마다 시장에 가장 먼저 나오는 상인 중 하나였다. 다른 상인들에게 빵을 팔기 위해서였다. 출근길에 영이는 종종 고소한 기름 냄새에 끌려 다가갔다가 여사장의 팔뚝에 눈길을 빼앗겼다. 군데군데 기름이 튀어 성한 데가 없는 팔이었다. 기름 튄 자국은 처음에는 붉다가 시간이 흐르면 거무스름한 흉터로 변했다. 영이는 그 흉터를 빤히 보다가 공연히 꽈배기나 공갈빵 같은 걸 하나 더 주문하곤 했다.

딸이 처음 빵 얘기를 꺼낸 건 고3을 앞둔 겨울이었다. 


빵이라니. 

영이는 말문이 턱 막혔다. 딸은 어릴 때부터 영이와는 닮은 데가 없었다. 돈 들여 가르치지 못해도 과외 받는 이웃집 애들보다 공부를 잘했고 말투와 행동도 똑 부러졌다. 영이와는 아주 다른 삶을 타고난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 딸아이가 기껏 하겠다는 일이 장사라니. 보고 배운 게 이것뿐이어서 일까. 영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이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빵이라니. 딸이 이른 새벽의 어둠과 추위를 뚫고 나와 펄펄 끓는 기름 옆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상상만으로도 영이는 속이 끓었다. 어린 영이를 데리고 튀김소보로집 앞에 서 있던 모든 날이 후회되었다.

그때부터 소보로가게에는 발길을 딱 끊었다. 지름길을 두고 빙 둘러 출근했다. 그전까지 고소하기 그지없던 빵 냄새도 더 이상 영이의 발을 잡아끌지 못했다.


빵집을 제 발로 찾아온 건 그 후로 처음이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버터향이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나무로 된 실내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소파에 기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벽면 하나를 차지한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는 바다가 보였다. 마치 카페의 한쪽 벽이 바다와 이어진 것만 같았다. 

“빵 종류가 많진 않아. 사장님 혼자 하시는 가게라.”

현수가 카페 사장을 변호하는 말투로, 하지만 주방 쪽에 있는 사장에게 들릴까봐 신경이 쓰이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카페 안은 고요했고, 영이는 딸의 입모양과 표정만으로도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다 맛있어 보이네. 엄마는 저거 먹을래. 소라빵.”

“소라빵? 엄마, 이 빵은 소라빵이랑도 닮았지만 소금빵이라고 해. 먹어보고 괜찮으면 집 근처 빵집에서 또 사 먹어. 파는데 많아.”

현수가 방금 영이가 가리킨 빵을 집어 쟁반에 올리며 빙긋 웃었다. 현수의 웃는 얼굴은 오랜만이었다. 영이의 마음한편이 따듯해졌다.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현수는 계산대 앞에 서서 사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중에도 현수는 마치 혼자 둔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듯 영이 쪽을 자주 돌아봤다. 덕분에 영이도 자연스럽게 현수의 표정을 살필 수 있었다.

영이는 조금 전까지 딸의 표정만으로 감정을 읽을 수 있다고 믿은 게 크나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사장과 마주 선 딸의 얼굴이 낯설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빛이 돌았고 입가에는 드러나면 안 되는 감정을 애써 감추듯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짓는 웃음 같았다.

현수가 커피 두 잔과 빵이 든 쟁반을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영이 맞은편으로 가 자리에 앉을 무렵에는 현수의 표정도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현수가 슬쩍 영이의 눈치를 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우리 동네에 계시던 분이야. 나 자주 가던 빵집에.”

“어쩐지, 아는 사람 같더라.”

현수 얼굴에 조금 전 카페 사장과 마주섰을 때 짓고 있던 낯선 표정이 다시 스쳤다.


영이는 문득 현수의 그런 표정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현수가 수능을 마치고 대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모녀가 함께 탄 버스에서 우연히 현수의 같은 학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매우 들뜬 목소리로 합격 소식을 전했다. 제빵으로 제법 유명한 대학이라는데, 가만히 듣다 보니 언젠가 현수에게 들은 적 있는 곳이었다. 서울도 아닌데다 전문대라는 소리에 영이가 펄쩍 뛰었던 바로 그 대학. 영이는 두 아이의 대화를 들으며 안도했다. 서울 4년제에 당당히 합격한 딸이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수는 달랐다. 그날 현수 표정이 딱 이랬다. 입가에 바짝 힘을 주고 감정이 드러날까 봐 애쓰고 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이든 영이는 상관없었다. 당시의 영이는 확신했다. 몇 년 만 지나면 현수도 그때 엄마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달을 거라고.

당시 영이가 꿈꾸던 현수의 미래는 이제 손에 잡히는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현수는 여전히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현수가 들키기 주저하는 감정이 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제저녁 고깃집에서 휴대폰으로 전송된 메시지, 현수가 입 밖에 꺼내지 않은 생각을 빠짐없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건 단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정도가 아니었다. 


“이 빵은 이름이 뭐냐?”

소금빵 옆에 놓인 빵을 가리키며 영이가 물었다.

“빵오쇼콜라.”

“빵이 뭐, 어쨌다고?”

“풉, 빵이 뭐 어떻게 한 건 아니고, 얘 이름이 ‘빵, 오, 쇼콜라’라구.”

입모양으로 알아맞히기에는 생소한 단어였다. 다행히 현수는 엄마가 엉뚱하게 들은 걸 오히려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쇼콜라가 프랑스어로 초콜릿이거든. 초코빵이라는 뜻이야.”

“프랑스어는 또 언제 배웠어?”

현수가 빵오쇼콜라를 반으로 나누며 한 번 더 풉, 웃었다. 

“배우긴 뭘 배워. 이 정도는 그냥 알지.”

“맞아. 넌 어릴 때부터 안 가르쳐줘도 잘 알았어.”

“하여간 엄마한테는 무슨 말을 못한다니까.”


현수가 초코가 더 많이 든 반쪽을 영이에게 건넸다. 영이는 빵을 받아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단단해 보이는 겉면은 의외로 폭신했고 초코는 딱 기분 좋을 만큼 달콤했다.

현수는 무심한 얼굴로 빵을 집어먹고 있었지만 영이에게는 이제 드러나지 않는 딸의 표정도 보이는 듯 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울컥 올라왔다. 영이가 감정을 삼키려는 듯 기침을 두어 번 하자 현수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엄마, 괜찮아?”

현수를 안심시키며 영이가 일어났다.

“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영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 복받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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