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귤예지 Apr 03. 2021

남편, '언니'가 되다

 

"괜찮으면 이방 들어올래요?"

어린이집 엄마들끼리 단톡방이 있다는 건 벌써부터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아침 등원 후에 전업맘 엄마들이 티타임을 가진다는 걸 전해 듣고 내가 모임에 못 끼어 우리 아이마저 소외될까 신경 쓰였는데 단톡방까지 있다니 조바심마저 들었다. 그러던 차에 전부터 친분 있던 같은 반 아이 엄마가 초대해주겠다고 손을 내밀어주었다. 고마웠다.


초대해준 엄마가 '괜찮으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반나절만에 밝혀졌다. 잠깐 사이 대화창에는 300개 이상의 대화가 쌓여있었다. 회사에서는 대화에 참여하기는커녕 대화 내용을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퇴근 후 아이를 재우고 차근차근 읽어보니 육아에 대한 정보부터 살림법, 맛집 정보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문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엄마들은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고 뒤늦게 그 방에 발들인 나는 제대로 끼어들기도, 그렇다고 없는 사람처럼 굴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 이따금 지나간 대화에 뒷북만 쳤다.


그러다 며칠 전, 엄마 몇이 벼르고 벼르던 미나리 삼겹살 점심 모임에 날 초대해주었다. 존재감 없이 자리만 차지하던 나까지 챙겨주는 마음이 진심으로 고마웠지만 업무가 한창 몰리는 시기의 평일 점심인 데다 약속 장소도 회사에서 왕복 한 시간 거리에 있어 참석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려고 쓰다 지우다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엄마들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먼저 대안을 제시했다.


- 지안엄마 시간 안되면 지안아빠라도 올래요?

전업 아빠로 산지 9개월, 남편은 여느 엄마 못지않은 전문 육아인으로 거듭났다. 어린이집 입소 시기에도 엄마들과 선생님들 틈에서 주눅 들지 않고 아이의 적응을 도운 덕분에 원장님 이하 선생님들과 엄마들의 두터운 팬심을 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엄마들의 점심 모임 초대는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아니라 남편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침내 디데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투덜대던 남편은 여느 때보다 오래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만지고 집을 나섰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OO(남편이름)언니 잘 있어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엄마들 틈에서 수줍은 듯 미소 띠며 한 손에는 집게를 한 손에는 가위를 든 낯익은 남자. 남편이었다. 쭈뼛쭈뼛 제대로 끼지도 못하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하면 어쩌지 싶던 내 염려는 무색해졌다.


모임에서 돌아온 남편은 밤마다 잠 안 자는 아이가 우리 아이뿐은 아니더라는 부터 아이랑 가기 좋은 카페 정보, 인근 유아반찬가게 정보까지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신나게 풀어놓았다. 누구네 엄마는 어디에 살다 작년에 이사 왔다더라, 누구네는 첫째가 벌써 초등학생이라더라. 엄마들의 시시콜콜한 근황을 전하는 남편은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는 엄마모임의 완벽한 일원이었다.

오가는 대화의 수위 때문에 남편을 차마 단톡방으로 초대하지는 못했지만 요즘도 엄마들은 종종 남편의 소식을 묻는다. 'OO언니도 잘 지내죠?' 하고.


여자는 남자로 가득한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어도 남자는 여자만 가득한 엘리베이터에 타지 못한다는 말을 직장 상사분께 들은 적 있다. 아이를 키우는 쪽은 여자이고 나가서 돈을 버는 쪽은 남자라는 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진 상식이고.

아이 키우는 아빠로, 일하는 엄마로 산지 9개월. 이웃주민들은 평일 낮시간에 아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남편을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대하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어떤 아빠는 엄마보다 아이를 더 잘 돌보고, 어떤 엄마의 적성은 육아보다 돈 버는 일에 더 가깝다.


불과 1년 전, 내가 주양육자이던 시절에 쓴 글을 읽어보니 거기에는 육아에 서툰 남편의 참여를 끌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있었다. 주양육자가 바뀐 지금은 아이의 식사량이나 재우는 법을 내가 남편에게 물어 익히는 입장이고 아이도 엄마보다 아빠를 훨씬 더 좋아한다.

내가 주양육자일 때 남편이 어딘가 어설퍼보였던 이유는 그가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양육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거다.


아이를 키우는 건 부부 공동의 몫이니 주양육자의 역할도 부부가 서로 합의해 정한 사람이 맡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경제적인 상황이나 가치관에 따라 두 사람의 의견이 한 데로 모여 엄마가 주양육자가 될 수도 있지만,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이 덜컥 맡겨지지는 않았으면 싶은 거다. 엄마가 되기 위해 감수할 것이 많을수록 여자는 출산의 문턱 앞에서 더 주저하게 된다. 첫째는 멋모르고 낳았지만 키우는  버거워 둘째는 생각도 않는다는 엄마들이 내 주변에도 많다.


"집에서 쉬니 좋냐? 언제 복직하냐?"

남자 동기들이 묻는 말에 남편은 발끈한다.

"쉬다니? 애 보는 게 얼마나 힘든데!"

"에이, 그래도 회사 다니는 것보다야 낫겠지."

이번에는 남편이 소매까지 걷어붙일 기세로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쉬워 보이면 어디 한번 해보든가!"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겪어보면 진짜를 알 수 있다.


이전 29화 일할래? 애 볼래? 물으신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