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포인트 레이 등대를 내려가지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먼저 저 멀리 황홀한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다. 일단 계단이 시작되면 바다로 쏠려 떨어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고소 공포증이 있는 M이 계단을 붙잡고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덜덜 떨며 내려가는 M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둔다. 미국 생활 40년째 코리안 아메리칸의 서사를 쓰고 있는 여전사 M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니...
바위 절벽 위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는 독수리 한 마리가 보인다. 외로워 보인다기보다 늠름해 보인다. 다시 장기 비행을 떠나기 전 물멍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안개로 보이지 않는 방향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는 것일까?
포인트 레이는 철새들이 쉬어가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을철에 내륙으로 이동하는 많은 철새들이 이 지역에 찾아든다. 철새들은 대부분 밤에 먼 거리를 이동하고 길을 잃기도 한다.
일부는 첫 여정을 시작한 새들이고, 일부는 내부 나침반에 오류가 생겨 거꾸로 된 경로로 이동하는 새들이다. 이렇게 새들은 긴 비행을 하는 동안 바람에 맞서 에너지를 소진한 상태에서 지칠 때가 많고, 방향을 잃고 기운을 소진해서 해안을 지나치기도 한다.
길을 잃은 새들은 피곤하고 목마른 상태에서 초목 지대를 찾는데 포인트 레이는 그들에게는 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초목의 품을 내어준다. 철새들이 이주할 때가 될 때 바람이 다양한 방향에서 불고 흐린 날씨가 되면 철새들은 일단 나무나 덤불로 이루어진 이런 피난처에 모이는데 그래서 이 지역의 나무와 덤불은 철새들에게 이주 덫(migrant traps)으로 불린다.
'덫'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이유는 철새들이 본능적으로 초목이 밀집된 지역에 끌려 들어오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포인트 레이에는 새를 사랑하는 사람들, 조류 사진가, 새를 연구하는 조류학자나 관찰자들이 모인다.
새를 관찰할 수 있는 포인트가 설명된 안내판이다. 등대 근처의 사이프러스 나무, 목장 서쪽의 사이프러스 숲과 기타 초목, Chimney Rock 지역의 덤불과 사이프러스 나무, Drakes Beach 근처의 사이프러스와 버드나무, 그리고 Drakes Beach 주차장 북쪽의 연못 등을 꼼꼼히 찾아 새를 따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철새들의 이주 시기인 5월에서 6월, 그리고 8월에서 10월 사이가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이 표지판에는 볼 수 있는 새의 종류만을 적어둔 것이 아니다. 철새들이 포인트 레이 해안에 도착하는 생태적 이유와 그들이 주로 찾는 피난처에 대해 설명하며, 그들을 품고 있는 침묵의 숲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가며 등대에 가까워올수록 난파선과 구조원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Lost to the Sea라는 제목의 안내판이다.
포인트 레이 해안에서 발생한 선박 사고들과 이 지역의 험난한 해안선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안내판은 이 지역에서 구명 대원들이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난파된 선원들을 구출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사용한 장비와 기술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포인트 레이는 안개에 자주 가려지고 강한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는 해안선으로, 많은 선박 사고가 발생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처음 기록된 선박 사고는 1595년. 이후 1849년 골드러시 이후 샌프란시스코가 주요 항구가 되면서 선박 사고가 빈번해졌다.
1870년에 포인트 레이 등대가 건설되었지만 사고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최신 항법 장치들이 도입되었지만, 험준한 해안선 때문에 선박 사고가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이 지역을 Punta de los Reyes (Point of the Kings)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왕의 위세가 느껴지는 해안이라는 뜻이었으리라. '이곳에 표류한 불행한 선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는 인용문에서 바다에 수장된 수많은 이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진은 1887년 San Francisco Chronicle에서 난파 사고 후, 승객과 승무원들을 구조한 후, Life-Saving Service가 말을 이용해 Samson 난파선의 잔해를 포인트 레예스 해변으로 끌어올리는 모습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험난한 해안선이 얼마나 난폭하게 힘없는 인간을 좌초시켰는지 끔찍하다.
난파선 생존자 구출에 대한 설명이다. 등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위험한 해안선을 지나는 선박들은 여전히 사고를 당할 위험이 컸다. 난파된 배 안에 여전히 생존자가 있을 수 있었기에 1890년부터 U.S. Life-Saving Service 대원들이 바다에서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서프맨(surfmen)으로 불린 이들 구조대원들의 좌우명은 “You have to go out, but you don't have to come back”이었다고 한다. '무조건 출동하지만 돌아올 기약은 하지 못한다...'. 위험한 구조 임무를 수행하러 나가야 하지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나타낸다.
이 구명 기지는 1890년에 정식으로 운영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보트 하우스, 숙소, 정원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1895년 전에는 전화조차 없어 구명 대원들이 3.5마일을 걸어 등대로 가야 했고 등대지기들이 샌프란시스코에 구조 요청을 하게 도와주었다니 믿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구명 대원들은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 작은 보트를 이용해 구조 작업을 수행했고, 위험하고 목숨을 건 이 작업은 생존자를 모두 구조하기 위해 여러 번의 출동을 감수하기도 했다고 한다.
1927년, 미 해안경비대(U.S. Coast Guard)는 구명 기지를 Drakes Bay의 보트하우스 위치로 이동했고, 비로소 큰 모터보트를 출동이 가능해져 해상 구조 시 더 안정적이고 신속하게 작동할 수 있었다.
구명보트가 36피트 길이의 모터 구명보트로 개선되어 가는 동안, 대원들은 더 멀리 이동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내고, 그들의 몸에서 고갈되어 버리는 에너지를 어떻게든 움켜쥐어야 하는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포인트 레이의 이야기는 그 장엄한 해안선과 등대, 험난한 바람과 안개로 인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소로, 여러 작품의 배경이나 촬영지로 사용되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Our Planet(2019)>는 철새들의 경로와 고래 이동 등, 포인트 레이에서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생태적 현상을 다루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PBS 다큐멘터리 <Point Reyes: The Edge of the World>도 야생동물, 특히 바다와 해안 생태계를 집중 중해서 볼 수 있다.
대만영화 <나의 소녀시대(2015)> 마지막 장면이나 공포영화 <바다의 언덕에서"(The Fog, 1980)>의 유령마을, 추리소설 <포인트 레이에서의 죽음(A Death at Point Reyes)>을 다시 보고 읽을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