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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일당 Jun 03. 2021

일 년 전 오늘 그리고 오늘

152일째, 서른.

 일 년 전 갔던 곳을 일 년 후 오늘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사람과 갔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 일 년 전에는 무슨 대화를 했더라 하고 되뇄다. 그때 쉴 새 없이 떠들어댔던 것 같은데 말들은 일 년 동안 기억으로 가두어지지 않고 다 날아갔나 보다. 문장으로 끝맺지 못하는 토막토막한 단어들 몇 개만 남았다. “이 장미 핀 길 지나면서는 네가 교회 누나 사귀었는데.. 멀티방 간 얘기 했던 거 같아” 그게 삼일 천하였던가, 한 계절은 갔던가. 한 계절 동안 데이트한 게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가물가물한 기억 토막들. 길가의 장미도 그대로다. 엄밀히 말하면 아니지. 그 때의 장미는 지고 새잎, 새 꽃봉오리일 테니까. 허나 줄기와 뿌리는  같을 터인데, 그럼 그때와 같은 장미라 할 수 있는 걸까? 내년이면 흔적도 없이 휘발될 실없는 생각과 말들을 쏟아내며 한강 공원에 도착했다. 분수대가 있고 터널처럼 휜 철봉을 장미 넝쿨이 감싸 안았다. 일 년 전 장미 군단이 봉오리도 더 크고 풍성했다. 오늘은 군데군데 휑하니 철봉이 보인다. 

 일 년 전 두 사람. 휘젓는 걸음에 맞추어 각각 놀던 팔 네 개, 손 네 개는 이제 두 개가 이어져서 하나 되었다. 여전히 두 사람은 팔 네 개, 손 네 개 있지만 일 년 새 세 개가 자연스러워졌달까. 강이 잘 보이는 벤치에 앉는다. 산책 나온 흰 강아지가 처음 보는 갈색 강아지와 인사하는데, 제자리에서 콩콩대는 발걸음이 경쾌하다. 비둘기를 쫓는 아이는 몇 번이고 새를 몬다. 비둘기의 발 빛깔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색깔처럼 채도가 높아서 참 곱고 신비롭다. 조 작은 발이 어찌나 잽싸게 움직이는지. 할아버지와 아저씨가 나란히 벤치에 앉는데 아저씨에 손에 들린 도시락 가방에서 마들렌, 요플레, 양념한 아몬드 같은 주전부리가 벤치에 진열된다. 아저씨는 꺼낼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주전부리를 소개하고 권한다. 할아버지가 말없이 눈빛과 손짓으로 벤치를 가리킨다. ‘일단 지금은 놔둬라, 알아서 먹을게’ 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일 년 전에 멈추면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걷고 또 걸었는데 오늘은 벤치에 머문다. 일 년 전과 달리, 함께 있는 시간을 걸음과 목소리 대신 긴 여백으로 채운다. 내년에 오늘을 생각하면 흰 강아지, 비둘기의 발, 도시락 가방 같은 토막토막한 이미지가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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