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세상이 다 계획대로 굴러가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에 가면 중학교가 있고, 중학교가 끝나면 고등학교가 있고, 그 끝에는 대학이 있고, 취업이 있고, 결혼이 있고, 노후가 있다.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인생은 짜인 레일을 따라가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해야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믿었다. 계획을 세우는 게 성실함이고, 계획대로 사는 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덜 친절했고, 예측보다 훨씬 더 많이 틀어졌다. 열심히 세운 계획은 번번이 어긋났고, 달력에 써놓은 목표들은 지나가면서 희미해졌다. 계획대로 산다는 게, 사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준비하고 예측하고 대비해도, 세상은 내 의지 따위엔 별 관심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계획을 세우는 걸 멈췄다. 도망치듯 멈춘 건 아니었다. 살아보니, 계획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게 지금껏 내가 한 선택 중에 제일 나았을지도 모른다.
계획 없는 하루는 자유롭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명확하지 않아서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밥을 언제 먹을지, 어디로 걸을지,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느낄지를 즉흥적으로 선택한다. 나를 옥죄는 ‘해야만 하는 것들’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이 상태가, 이상하게도 더 나다워 보였다. 정해진 루트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나를 내 마음대로 살게 해준 느낌. 비로소 ‘사는 것’과 ‘살아내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됐다.
사람들은 계획 없이 사는 걸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노력하지 않는 거라고, 현실 도피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시선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무작정 도망치는 것과는 다르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계획 없이 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앞이 안 보이는 길을 향해 걸어가는 그 막막함을 감당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누구보다 불안하고,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 오늘이 끝나고 내일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면서도, 그래도 내 삶을 내 식대로 살아보기로 한 결심. 그게 내가 가진 용기의 전부였다.
계획 없이 살아온 날들엔 실패도 많았다. 엉망이었고, 뒤죽박죽이었고, 남들보다 훨씬 느렸고, 때론 바보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짜 내가 있었다. 비교하지 않고,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히 나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순간들이었다. 웃고 울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그 모든 순간들이, 단지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나를 조금 더 알게 됐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진짜 싫어하는 게 뭔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여정이었다.
계획이 없다고 해서 방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나름의 리듬과 호흡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나를 챙기고, 다시 하루를 버텨내는 것. 그것도 하나의 삶이었다. 누구는 그것을 무기력이라 부를 수도 있고, 누구는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 하루가 아주 소중한 성취였다. 계획이 없기에 실망도 덜했고, 기대가 없기에 감사가 더 많았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 우연한 만남, 스스로 만든 하루의 여백. 그 모든 것이 계획 밖에서 피어난 작은 기적이었다.
계획 없이 살아가는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된 기분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성공 공식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남들처럼 바쁘지 않아도, 누구보다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지금 충분히 내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누구보다 내 삶에 솔직했다. 그게 내가 바랐던 삶의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혼란과 무계획 속에서도 나는 가장 나다운 선택을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나는 만족스럽다.
어쩌면 계획 없이 산 게,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상처도 나답게 겪었고, 기쁨도 나답게 느꼈다. 그렇게 나답게 살아온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나만의 속도로. 그렇게 한 발씩,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걸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