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이 상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불확실함의 매력 - 클라이밍
“클라이밍이요..??! 전 고작 그런 거에 성취감 같은 거 안 느껴요ㅎ”
HB코치가 어느 날부터 실내 클라이밍을 함께 하자고 꼬셨다. 그때쯤 그는 클라이밍에 엄청 빠져 있었다.
(*이 글에서 말하는 클라이밍은 실내 암벽장에서 같은 색상의 홀드를 잡고 오르는 '볼더링'입니다. 그냥 쉽게 클라이밍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센터의 회원이었던 J님을 통해 시작했다가 같이 운동하는 회원들 여럿에게 추천하며 영업했고, 일종의 클라이밍 크루가 만들어지던 참이었다. 클라이밍이 너무너무 재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했으면 좋겠다나 뭐라나.. 너무 재밌고 성취감도 엄청나다고, 나에게 여러 번 권유했다.
하지만 내 반응은 딱 첫 문장과 같이 시니컬했다.
‘그냥 벽 타고 오르는 게 뭐가 재밌지?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정글짐 타고 노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실내에 만든 인공 벽에, 홀드 몇 개 붙여놓고, 그걸 끝까지 가서 성공하는 게 성취감을 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난 성취감에 야박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작은 일에 성취감을 느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손과 전완근에 약력이 없는 편이었는데, 클라이밍은 악력이 좋아야 잘할 것 같았다. 손 아플 것 같아서 싫었다. 그렇지만 끈질겼던 제안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냥 한 번만 해보지 뭐. 하는 심정이 되어 모임에 나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편견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걸로 판명되었다.
확실히 손은 아팠다. 그런데 손이 조금 아픈 것 따윈 괜찮을 만큼 TOP을 찍는 성공의 뿌듯함을 느꼈다.
몇 번 튕겼던 게 뻘쭘하게도, 못 이기는 척 따라간 암장에서 나는 누구보다 몰입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끈질기게 권유해 준 코치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첫날 이후로 나는 매달 1번 있는 클라이밍 모임에 꼬박꼬박 나가게 됐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뒤에야 나는 많은 사람들이 클라이밍이 성취감을 준다고 했던 걸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클라이밍에서의 성취감은 이성적이라기 보단 동물적 본능으로 따라오는 희열 같은 거였다.
그러니 성취감에 야박한 나 같은 사람도, 오히려 쉽게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운동이었다.
인간은 본래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 동물이다.
우리 뇌는 원시시대의 습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하는데, 야생에서 살아남기란 녹록지 않으니 불확실성은 생명과 직결되는 요소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겁을 내고, 낯선 것,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일단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일상에서 나는 언젠가부터 모든 것을 예측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클라이밍은, 쉽사리 예측이 되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홀드들이 가득 붙어있는 벽을 바라본다. 내 팔과 다리의 길이를 가늠하고, 어떤 자세로 어느 쪽 팔과 다리를 먼저 뻗을지 계획을 짠다.
일단 인사이드 자세로 시작을 해서 오른손 오른발을 가고, 멀리 있는 홀드를 런지 자세로 한쪽 다리에 힘을 싣고 일어나고.. 다음 홀드는 까다로우니까 그립을 정확하게 잡고…
이게 될까? 저게 될까? 요리조리 상상을 하고 나면 그제야 벽에 붙을 용기가 조금 생긴다.
그리고 용감하게 일단 시작.
그런데 막상 벽에 붙어보면 내 생각과 너무 달라서 놀랄 때가 많다.
닿을 것 같지 않던 다음 홀드가 쉽게 닿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문제는 나의 생각보다 쉽기도, 어렵기도 하다.
그러니 결국 예측 불가능. 해보기 전엔 될지 안 될지 모른다.
몸으로 직접 벽에 붙어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클라이밍은 ‘순수한 희열’을 선사한다.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해내는 건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보다 행운의 기쁨과 성취감을 크게 주니까.
해보기 전의 막막함을 떨쳐내고 벽에 붙을 때의 긴장과 흥분이 있고,
못할 줄 알았는 데 성공해 버리면 엄청난 희열을 느끼게 되고,
될 줄 알았는데 해내지 못하면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른다.
좀 무서운 순간을 견디고 손을 뻗었을 때 홀드가 딱 잡히면 그 순간 몸에서 본능적으로 전해오는 해냈다는 쾌감은 짜릿하고 중독적이다.
불확실함의 매력.
클라이밍에 점점 빠져갈수록 그게 내가 클라이밍을 사랑하는 지점이라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일상에서는 불확실함이라는 건 두려움으로만 다가왔는데, 클라이밍장에서 만큼은 불확실한 건 재밌고, 그래서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몸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그 불확실의 묘미 안에서 나는 내가 몰랐던 나의 표정들을 발견했다.
클라이밍을 할 때는 매번 영상을 찍게 되는데 그 영상 안에서 나의 모습은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싶을 정도로 아주 이가 쏟아지게 웃으며 즐거워하고, 아쉽게 떨어지면 진심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아쉬워한다.
아니 왜 저러고 있지? 이렇게까지 재밌을 일이라고? 믿을 수 없지만 해맑은 내 표정이 말해준다. 그렇다고.
인생은 결국 ‘내가’ ‘직접’ ‘나의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상상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은 경험주의자이고, 새로운 경험이 늘 즐거운 사람인데 그런 지점이 클라이밍과 맞닿아 있는 것 아닐까?
해봐야 안다.
그러다 보면 생각보다 쉽기도, 생각보다 어렵기도 하지만 그 또한 정답을 알고 생각대로만 되는 것보다 매력이 있다.
클라이밍에서 배운 용기와 불확실성의 즐거움으로, 인생이라는 불확실 덩어리를 껴안고 즐길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벽에 붙는다.
[내가 느낀 클라이밍의 재미 5가지!]
1) 좀 무서운데 순간 겁나는 걸 견디고 손을 뻗었을 때 딱 잡히면 해냈다는 쾌감
2) 레벨이 나눠져 있어서 성장이 눈에 보이고 계속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남
3) 함께 하는 사람들과 같은 문제를 풀고 알려주고, 서로 응원해 주는 재미가 있다. (운동하면서 수다 떨 시간이 많음)
4) 은근히 창의력을 요구하는 운동. 같은 문제도 나에게 더 편한 다른 방식으로 풀 수 있다.
5) 나의 모든 피지컬, 유연성과 힘을 집약적으로 분출하는 재미. 각자 다른 장단점을 잘 활용해서 등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