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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웅식 Aug 11. 2023

검은 우물

2

 황 노인은 허공에 손으로 빗금 두 개를 그어 ‘X’라는 글자를 썼다. 주먹을 쥔 손에서 검지만 세워 허공에 연신 ‘X’를 그려냈다. 그는 앞이 흐릿하게 보였고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몸이 축축했다.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눈, 휘둥그레진 검은 눈동자가 시계추처럼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불덩어리가 자신의 장기를 태우는 것 같아 황 노인은 몸에 달라붙은 불을 끄고 싶었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검은 눈동자가 위로 쏠렸다. 황 노인의 눈에 흰자위만 보이자 현수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았다. 황 노인은 그 손이 자신을 안은 손이라고 생각했다. 거센 손, 자신을 부둥켜안은 손,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어깨 위로 올렸다가 다시 꽉 잡는 손.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를 쫓아오는 발들이 수두룩했다. 환한 빛이 들어오는 빈방에 자신이 덩그러니 놓였다. 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을 침대에 묶고 쳐다보았다. 기다란 칼을 든 사람이 그 칼로 자신을 내리 찔렀다. 

 너무 아프다고 황 노인이 말하자 현수는 진통제를 투여하는 버튼을 다시 눌렀다. 15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어 진통제가 줄을 따라 내려오지 않았다. 아프다는 말을 허다히 들어 버튼을 너무 많이 누른 듯했다. 

 황 노인은 맥락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커튼이 있었고 칼잡이들이 칼을 자신의 몸에 박아 넣었다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도 했다. 현수 어머니는 현수에게 네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초조해했고, 현수는 암호 같은 황 노인의 말을 들으며 그 말의 뜻을 추론했다. 현수가 생각하기에 칼잡이들은 칼을 든 의사를, 아이는 수술실 문 앞에서 서성거렸던 러시아인 부부의 아이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보호자 대기실 벽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서 수술 중이라는 황 노인과 황 노인 이름 밑에 있는 러시아인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인 부부는 수술실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서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현수는 수술실 문과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난간에 기대 창 바깥, 저 멀리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수술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에게는 상황을 잘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곧 의사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영어로 대화했다. 수술 시간은 네 시간을 넘어섰고, 수술실에서 집도했던 의사가 나와 러시아인 부부에게 뭐라고 설명했다. 통역하는 다른 의사가 집도 했던 의사의 말을 듣고 아이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듯했다. 러시아인 부모의 안심한 얼굴은 아이의 수술이 결국 잘 되었다는 말을 드러내 주는 것 같았다.


 황 노인이 목마르다고 해서 현수는 거즈로 그의 입술을 적셔주었다. 황 노인은 당분간 물과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수술 후 세 시간 안에 잠이 들면 안 되기에 현수는 황 노인에게 계속 말을 걸어야 했다. 현수는 황 노인에게 자신이 누군지 계속 물어봤고 현수 어머니도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자기가 누구냐고 소리를 높였다. 황 노인은 또다시 손가락으로 허공에 엑스를 두세 번 더 그려냈다. O, X 표시 중 X를 보여주는 이유가 현수는 궁금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무엇을 항의하고 싶은 걸까. 신우암에 걸린 황 노인의 왼쪽 신장을 하나 잘라냈을 때 의사가 보호자를 불렀고 현수는 수술실 앞에서 의사의 말을 들었다. 협착이 되지 않아 신장 잘 떼어냈다고, 요관과 방광 일부만 잘라내면 수술은 끝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현수는 의사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요관과 방광 일부를 잘라냈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아버지가 온전한 의식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혼미한 정신을 걷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기다리기만 해도 되는지, 현수는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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