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 워홀 일기 01
1월. 뒤풀이에 갔다가 코로나에 걸렸다. 요즘 누가 코로나 걸리지, 싶었는데 그게 나였다. 휴학 1년 차, 4개월간의 부트 캠프가 끝난 참이었다. 의무는 아니었지만 가족들을 위해 자가 격리를 하는 동안 올해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 봤다. 그때 읽은 책이 바로 "이제 나가서 사람 좀 만나려고요"였다. 내향인인 작가가 1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외향인으로 살아본 에세이였다. 작가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 많았다. 작가는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이었고 발표는 물론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도 주목받는 걸 꺼리는 내향인이었다. 스피치 수업을 듣고, 스탠드 업 코미디 무대에 서고, 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말을 걸기도 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세상을 넓혀가는 걸 보며 나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더 넓은 세상에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학생으로서 더 넓은 세상에 가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랬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교환학생이었다. 우리 학교는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 추가 학기를 등록해서라도 본교에서 한 학기를 다녀야 해서 4학년 1학기가 교환학생을 갈 마지막 기회였다. 그동안 근로 장학금과 아르바이트 월급을 모아둔 게 700만 원 정도 됐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여유롭게 생활하고 여행도 다니려면 모은 돈의 두 배는 필요했다.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1번 교환학생 장학금 받기. 2번 아르바이트하기. 둘 다 쉽지 않아 보였고 힘들게 모은 돈을 한 번에 다 써버리는 것도 망설여졌다. 게다가 지금 신청하면 9월 가을 학기에 교환학생을 갈 수 있는데, 한 학기를 더 휴학하고도 모집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그래서 갑작스럽지만 워킹 홀리데이가 후보에 올라왔다. 워킹 홀리데이를 알고는 있었지만 학생 때만 갈 수 있는 교환학생에 좀 더 끌렸었다. 교환학생을 고민할 때는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게 많았는데 워홀을 선택하자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유튜브와 네이버 블로그를 하루 종일 검색하며 틀을 잡았다. 가려고 찍어둔 지역을 검색해서 뜨는 블로그 글을 전부 다 읽었다. 겨울이 싫으니까 호주로, 1년만 있기 아까우니까 세컨 비자를 먼저 따야겠다, 브리즈번으로 입국해서 퀸즐랜드 근교 시골로 이사해야지, 하는 식으로 많은 일들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것만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워킹 홀리데이를 가겠다고 말했을 때 가족들은 응원보다는 반대하는 쪽이었다. 엄마는 휴학도 1년 했으니 빨리 졸업하면 좋겠다고 했고, 아빠는 지원을 해줄 테니 교환학생을 가는 게 어떻냐고 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자취도 해본 적 없으면서 혼자 외국에 나가서 살겠다니. 호주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한 이상 꼭 해야만 하는 성미를 가졌고, 이미 워킹 홀리데이로 마음이 기울어 비자 발급까지 끝낸 상태였다. 비용도 전부 내가 모았기 때문에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아빠와 팽팽하게 대립하다가 힘들면 바로 돌아오는 것으로 얘기를 마쳤다.
여권 발급과 비자 신청을 기점으로 소비 파티가 열렸다. 26인치 캐리어부터 샤오미 콘센트, 상비약, 하다못해 양말과 휴대폰 액정 필름까지 전부 몇 개씩 구비하느라 카드가 쉴 틈이 없었다. 대체 왜 사도 사도 필요한 게 생기는지. 한동안 못 볼 걸 대비한 친구들과의 모임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해도 몇 년 동안 차곡차곡 모은 돈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줄이야. 공항에서 브리즈번 시티까지 가는 트레인 티켓을 결제하고 나서야 지출이 끝났다.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용돈을 받아 돈이 조금 더 채워졌지만 떠나기 전 준비에만 400만 원 정도를 썼다.
출국 전날,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정리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출국하느라 몰랐던,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복잡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새로운 곳에 간다는 설렘과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막막함, 약간의 두려움, 마지막까지 엄마에게 틱틱거린 것에 대한 미안함. 나는 왜 가족을 두고 떠나려고 했을까. 새로운 곳에 간다고 해도 나는 그대로인데 뭘 어쩌겠다고. 그렇지만 비싸게 끊은 비행기 티켓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동생과 나란히 누워 새벽까지 얘기를 하다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