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 워홀 일기 02
브리즈번으로 향하는 밤비행기에서 비행기 창문에 비친 야경을 찍으며 들뜬 것도 잠시, 문득 이렇게 무거운 고철 덩어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지,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륙을 알리는 커다란 엔진 소리를 들으며 다 괜찮을 거라고 되뇌면서 눈을 감은 채 손잡이를 꽉 쥐었다. 발 밑이 붕 뜨는 느낌도 잠시 비행기는 금세 수평을 되찾았다. 창 밖으로 깜깜한 밤하늘과 저 멀리 하얀 불빛들이 보였다.
기내식이 두 번 나오고 이제 정말 혼자라는 사실에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잠드는 것을 반복하니 9시간이 넘는 비행이 끝났다. 외향인들은 비행기에서도 친구를 사귄다는데, 우는 걸 옆옆자리 사람에게 들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입국 신고서를 들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승객들 뒤를 따라갔다. 호주는 겨울에도 따뜻하다더니 과연 한국 봄 날씨에 맞춘 옷차림이 호주 가을 날씨에는 조금 더웠다. 간단한 질문 몇 개만 받고 입국 심사를 패스했다.
비행기에서 울었던 걸로는 부족했는지 호주에 도착하고 첫 일주일은 눈물로 지새운 밤의 연속이었다. 툭하면 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만 밝혀두고 싶다. 울 정도로 힘든 일은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다. 단지 그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는 것뿐이다. 한 번 울고 나면 기분이 꽤 나아지니까.
집을 구해 이사하기 전까지 지냈던 백패커스는 매일 밤 파티가 열렸는데 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시느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애초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낮에는 계좌를 개설하고 이사할 방을 찾는 등 바쁘게 보내면서 감정을 회피할 수 있었지만 밤에는 외로움과 서러움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혼자서도 뭐든 잘 해내고 새로운 환경에 나를 내던지는 것을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힘들다고 털어놓을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게 너무 외로웠다. 그때까지도 엄마와 아빠는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힘들다고 내색하기 싫었다.
한국에서는 꽤 운이 좋았는데, 그 운이 호주까지 오는 비행기에 못 탔는지 이상한 일이 기가 막히게 많이 일어났다. 도착 첫날, 환전을 위해 한국에서 쓰던 파킹 통장 앱을 켰는데 접속이 되지 않았다. 어플이 해외 접속을 차단해 둔 것 같았다. 모든 돈이 그 통장에 있는데 전원을 아무리 껐다가 켜도 흰 화면에서 넘어가질 않았다. 어떡하지? 국제전화로 고객센터에 연락해야 하나? 이게 전화로 해결되긴 할까? 아빠한테 말하고 딱 그만큼만 빌려달라고 할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다행히 나도 모르는 새에 오픈 뱅킹으로 계좌를 연결해 둬서 돈을 옮길 수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철렁한다. 이런 일이 하나 해결되면 또 하나 생기는 식이었다. 영어 문제는 그나마 귀여운 축에 속했다.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할 때 영어는 자신감 하나로 진행했다. 출국 전 친구들이 영어는 잘 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어느 정도 한다고 대답하고 다녔더니 이상하게 다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다. 라이팅은 자신 없고 스피킹은 그보다 낫고 리스닝을 가장 잘하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귀는 트였지만 문법이나 단어 공부는 멀리한 케이스였다. 유튜브로 워킹 홀리데이 브이로그를 보며 나 정도면 주문은 받겠다, 일단 가서 더 공부하지 뭐, 싶었다. 하지만 호주 특유의 악센트와 빠른 속도는 정신을 바짝 차려도 좀처럼 알아듣기 어려웠다. 처음 마트에 간 날도 그랬다.
호주에서는 스몰톡으로 How are you? 를 물어본다는 것과 I'm good 이라고 대답하면 된다는 것, 결제가 가능한 체크카드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서 마트에 들어갔으나 캐셔의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두니더박?
지루한 표정의 캐셔가 두 번쯤 똑같은 말을 반복했을 때,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이 자신의 가방을 가리키며 봉투 필요하냐고 말을 건넸다. Do you need a bag? 이렇게 짧은 문장을 못 알아듣다니. 이 일은 약간의 트라우마로 남아 한동안 무인 계산대만 찾아가게 만들었다.
미리 찾아둔 브리즈번 근교의 시골은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페이스북으로 두 곳의 인스펙션-계약 전 직접 방을 보고 컨디션과 계약 조건을 확인하는 것. 확인 후 세입자가 계약을 거절할 수 있고 집주인이 세입자를 거절할 수도 있다-을 잡고 시골로 향했다. 시티를 지나자 곧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드넓은 초원과 막 갈아엎었는지 흙만 보이는 밭, 뜬금없이 서있는 집, 더 뜬금없이 풀밭에 나와있는 소들을 구경하며 목적지를 향해 갔다. 몇 개의 근교를 지나 드디어 시골에 도착했다.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떠올린 감상은 동네가 참 납작하네, 였다. 길에 심어둔 가로수가 건물보다 더 높았다. 혹시 3층 이상의 건물을 법적으로 금지한 건가, 같은 생각도 들었다. 땅이 납작한 만큼 하늘이 가깝게 느껴졌다.
버스 정류장에는 집주인이 나를 데리러 나와 있었다. 마침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그를 따라 뜨거운 호주 햇살을 등지고 걸었다. 처음 본 집의 인상은 다시 생각해도 좋지 않았다. 지내게 될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집 옆에 붙어있었고 계단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발이 아래로 빠질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자 식탁 위에 먹던 음식이 접시 채 방치되어 파리가 날아다녔고 가스레인지에는 그 음식을 만든 게 분명한 프라이팬과 뒤집개가 올라가 있었다. 아무래도 청결의 기준이 다른 것 같았다. 이 집에 들어온다면 다른 사람과 한 방을 쓰게 될 거고, 지금 한국인 여자 한 명과 연락 중이라고 했다. 룸메이트가 생기는 건 나쁘지 않았다.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문제였다.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집을 나왔다. 다음 인스펙션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동네에 하나뿐인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두 번째 인스펙션은 훨씬 나았다. 이 집도 2층집이었지만 다행히 집 안에 계단이 있었다. 같이 살 하우스 메이트들은 다 아시안 여자 워홀러였고 집주인인 젊은 호주인 커플도 같이 살기에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오지 쉐어-호주 사람이 쉐어하는 집-로는 특이하게 집에서 신발을 신지 않고 슬리퍼나 맨발로 다닌다고 했다. 잘된 일이었다. 내가 살게 될 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벽 한 면에 길게 자리 잡은 창문이 보였다. 오후였지만 햇빛이 들어와 불을 꺼도 어둡지 않았다. 혼자 쓰는 방인데도 퀸사이즈 침대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주세가 비싸고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렌트는 현금으로만 내는 게 걸렸지만, 창문 가득 담긴 하늘과 야자수 나무를 본 순간 이 방에 마음을 뺏겼다. 이후로 브리즈번에서 시골까지 두 번 더 인스펙션을 다녀왔지만 남자만 받는 집이거나 조건이 맞지 않아서 이 방에 들어가기로 했다.
거처가 정해지자 우울함도 훨씬 나아졌다. 이래서 주거의 안정이 중요하구나 새삼 느끼며 미술관에 가거나 도서관에 가서 레쥬메를 쓰며 얼마 남지 않은 도시의 삶을 즐겼다. 이사 날, 몇 번이나 타본 버스였지만 아예 떠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새로웠다. 시골 생활을 끝내고 다시 시티에 나올 때도 이 버스를 타겠지. 그때는 어떤 기분일까. 홀가분하겠지? 짐이 더 늘지는 않았을까. 브리즈번에서 고작 2주 있었지만 그새 짐이 늘었다. 백패커스에서 밥을 해 먹느라 산 2달러짜리 소금과 제일 싼 식용유, 친해진 한국인 언니로부터 헤어 드라이기도 받았다. 다시 이 버스를 탈 때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많이 달라져있을 거라는 예감을 안고 새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