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세상에 소음과 얼마나 섞여 있는가?
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소음에 파묻혀 귀가 먹었다.
말 그대로 나의 기준점이 없었다. 상황에 적응하거나, 타인의 기대에 따라 움직였다. 앞 시리즈에서 계속하고 있는 이야기다. 또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고집이라 여기고, 아무 말 없이 한편에 접어두기도 했다.
그렇게 어느 날, 7년간의 장기 연애를 마치며 알게 되었다.
기준이 없는 삶은, 나를 지키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을. 나만의 기준과 원칙이 없는 삶은 무색무취라는 것을.
이별 당시 들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빠, 마지막이니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조금만 이기적으로 살아. 색깔 없이 살지 말고'
나는 새하얀 도화지였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들어주었다. 내 색깔보다도 그 의견을 수용하여 색을 칠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 그게 심적으로 편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자처한 것만 같다.
그 마음밭이 자라나자 무시받기 일쑤였고, 타인은 나를 향해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기준이 없는 삶은 나를 꽤나 부끄럽게 만들었다. 마음이 옹졸해져만 갔다.
그 이후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나만의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타인과 더 잘 섞일 수 있다
둘째, 기준점을 가져야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셋째, 수용의 입장만 취하면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고집과 혼동될 수 있다. 그러나, 기준은 고집과 다르다.
고집은 닫힌 확신이고, 기준은 열린 성찰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소음 속 나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기준을 어떻게 찾아볼 것인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럴 땐 반대로 생각해 보면 편하다. 나는 무얼 취해야 하는가 보다 무얼 덜어야 하는가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더 소유하라 말한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많이.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자들은 이를 역설한다.
진짜 강함은, 불필요한 것을 줄이는 데서 온다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을 채우는 게 아니라
‘하지 않을 것’을 선명히 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꿨다.
나는 어떤 종류의 성공을 원하지 않는가?
내가 반복적으로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은 무엇인가?
선택에 과정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내 삶에서 불필요한 껍질을 벗겨냈고, 그 안에서 작지만 단단한 씨앗 하나가 보였다.
‘앞으로 내 마음을 속이는 선택은 하지 않고, 그러한 성공은 바라지도 말자'
그것이 나만의 첫 번째 기준이었다.
첫 번째 기준을 세우자 찾아온 변화는 거절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였다.
내 마음을 속이지 않기 위해선 나를 보호해야 했다. 내가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고,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는 줄여야 했다. 그것이 리소스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한 생각의 끝은 거절을 잘해보자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별 이후 문득 작년 전시회가 생각났다.
작년 11월 안국역 부근에서 meet me(밋미) 오프라인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록물이 모인 전시회였다. 각자만의 서사를 담아 일련의 기간 동안 기록한 기록물들을 빼곡히 마주할 수 있었다. 참으로 다양하고 꾸준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숭고히 애쓰는 모습들이 존경스러웠다.
수많은 기록물들 중 내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기록물은 단어에 대한 작자만의 정의노트다.
한 작자는 거절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의 기본적인 영역을 지키는 힘
싫어를 100번 말하는 것
내 능력치와 한계를 인정하는 것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해야 하는 것
10가지가 넘는 작자만의 정의가 있었다. 나는 나의 기본적인 영역을 지키는 힘에 눈길이 갔다.
일반적으로 거절이라 하면 'reject, 거부' 등 부정적인 단어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의 기본적인 영역을 지키는 힘으로 치환했을 땐 정말 임팩트 있는 나의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
이후 거절의 선택들을 하나 둘 해나갔다. 처음엔 거절 이후에 상대방의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하긴 했지만, 훈련이 답인지 점점 괜찮아졌다. 관계에서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시간을 자유로이 확보하니 심적으로 편안했다.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잦은 만남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것 만큼은 버리지 않아야 할 것을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나를 꼭 움켜쥐고 있는 것,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내 안에서 가장 빛날 때 나다울 수 있다.
질문 (1)
나다운 삶을 위해 내가 절대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질문 (2)
현재의 삶에서 가장 꽉 쥐고 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감정적인 상황에서 우리 감정을 면밀히 컨트롤하기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구조다. 감성이 이성을 지배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만의 게임룰 즉, 원칙을 설정해 둔다면 조금이나마 통제 가능하며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코치다. 코칭이 아니어도, 파편 된 삶의 조각에서 코치로써의 삶을 살아가고픈 소망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나의 모자를 벗고 코치이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나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화에 미숙했다.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경우에 묵묵히 듣기보다 내 경험에 빗대어서 '나도 그랬는데, 나도 똑같은 경험이 있어'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센스'라는 책을 읽다가 답을 발견했다.
그러한 대화는 결국 자기 에고를 더 드러내고, 상대보다 나에게 계속 화두를 돌리고픈 주인공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 일종의 나르시시즘과 통제 성향도 반영되어 있다고 심리학자는 해석했다.
꽤나 공감이 되었다.
상대방은 더 할 말이 있는데, 주인공을 나로 돌려 공감하는 순간 그 화두가 내 것이 된다. 상대방은 자신의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보다 그 사람도 그랬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구조로 변경된다. 더 이어가고 싶고, 더 꺼낼 말이 있어도 화자가 변경되면 잠시 수축되고 만다.
나도 그러했다.
몇 달 전 동생과의 진로 대화에서 20분쯤 지났을까? 동생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보았다. 형의 입장이 되다 보니 자꾸 충고하고 싶고, 그런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려는 주인공병이 도진 것이다.
묵묵히 듣기보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과 동시에 동생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깨달았다. 이러한 대화는 잠깐은 괜찮을지언정 지속하기엔 힘들겠구나.
그래서, 룰이 필요하다. 나는 그 일환으로 대화 전 코치 벳지를 보는 행위로 설정했다.
왜 이러한 선택을 하는가?
우리 인생에서 반복되는 상황에 대해 미리 정해놓은 원칙이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화(게임)를 임할 때 코치 벳지를 달고 입장한다. 휴대폰 바탕화면도 코치 벳지로 되어 있다. 나의 룰이다. 벳지를 보는 순간 이 대화는 듣는 포지션으로 바뀐다. 상대가 구체적인 조언과 내게 질문을 건네지 않는 이상.
그러자 상대는 신나서 이야기한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솔직한 부분까지도.
서로의 솔직함을 공유하면 가까워진다. 원칙은 나의 어떤 걸 내려놓는 행위이자 상대방에게는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
코치 벳지를 달고 입장하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기 이야기를 잘하지 않던 엄마, 우직하신 아버지, 동생도 내게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나아가, 사회에서도 동일하다. 생각지도 못한 분께 전화를 많이 받을 때가 있다. 왜 나에게 전화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 끝엔 그냥 그렇게 들어주는 네가 생각이 났다고 한다.
원칙과 기준을 세워 삶에 임하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찾지 않아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내 삶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고 있다.
어둔 밤이 지나고 또 동이 터온다.
한편, 원칙을 세우면 결국 가까워진다. 분명, 대화뿐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 적용해 볼 수 있다.
가령 아래의 것들도 있다.
감정이 격할 땐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3일 이상 설레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에게 없는 감각은 감각 있는 사람의 눈으로 빌려보고 시작한다
이 규칙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기보단,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말해준다.
즉, 기준은 ‘정체성’이 아니라 ‘게임 규칙’이다.
내 삶이 나만의 체스판이라면, 이 룰은 내가 스스로 만든 전략이다.
질문 (3)
당신만이 고수하고 있는 원칙은 무엇인가?
질문 (4)
그 원칙을 상황에 맞게 변경할 수 있다면 무엇을 시도해보고 싶은가?
우린 종종 나라는 존재를 하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내면의 자아들로 이루어져 있다.
감성적인 나, 이성적인 나, 불안한 나, 과거에 머물러 있는 나.
아티스트웨이의 저자인 줄리아 캐머런은 이를 ‘내면의 아티스트'라 표현한다. 아티스트들에게 진짜 자유를 주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자신 안의 다양한 자아를 수용'하는 것이라 한다.
삶의 결정과 기준을 세울 때 내면의 아티스트들이 집합한다. 생각이 원체 많고 혼잡한 나인지라 각 자아들이 여러 가지 발언권을 갖는다.
그들의 말은 이렇다:
이성적 자아: "이건 비효율적이야. 감정에 치우쳐 있어."
감성적 자아: "하지만 이 일은 나에게 살아 있다는 감각을 줘."
불안한 자아: "혹시 또 실패하면 어쩌지?"
과거의 자아: "그땐 이걸 택했다가 상처받았잖아."
성장하는 자아: "이번엔 새로운 방식으로 해보자. 다르게 선택해도 괜찮아."
그들은 긴 토론이자 회의 시간을 거쳐 결론에 다다른다.
이러한 내면의 아티스트들에 소리에 귀 기울이며 토론한 결과가 곧 기준이자, 후회 없는 선택을 만들어줄 때가 많다.
그들이 충분히 말하고, 나는 경청한 후 조율된 기준 하나를 꺼낸다. 이 기준은 단단하면서도 유연하다.
회의 시간이 짧아진다는 건, 내면의 자아들을 잘 통솔한다는 뜻이다.
또한 토론 시간이 줄어든다는 건, 결정의 시간이 빨리진다는 뜻이다.
마치 나의 모든 ‘나’들이 합의한 삶의 언어 같다.
질문 (5)
당신 안에는 몇 명의 아티스트가 존재하는가?
질문 (6)
그 아티스트들은 당신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주 묻는다.
“정말 이게 맞는 걸까?”
하지만 기준은 정답이 아니다. 기준은 ‘나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이다. 그 방향이 매일 조금씩 수정될지라도, 그 나침반이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흔들림 없이 살아가게 한다.
어떤 날은 기준이 나를 무겁게 만들고, 어떤 날은 기준이 나를 지켜준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서 내가 선택한 이 기준 하나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조용히 내 안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선택은 너다운가?”
덜어내고, 정리하며, 대화하며 세운 기준.
그 기준이 곧,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길은 그 기준 위에 천천히 지어져 간다.
여섯 번째 보물 요약
1. 기준은 덜어냄에서 시작된다. 꼭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해 보자.
2. 기준은 나만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원칙이 나를 단단히 한다.
3. 내면의 자아들에게 귀를 기울이자. 기준이 들린다.
이제야 집 푯말에 새겨지는 이름 '나우디'
아이는 나우디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명한 글자가 내 집 가장 전선에서 나를 알려주기 시작한다.
푯말이 세워지자 사람들이 찾아온다.
어? 나 뭘 준비해야 하지?
아이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