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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l 11. 2023

When it all falls down

episode 09.


 일주일 내내 고된 비 소식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건만, 아침부터 태양이 볼록 솟아올랐다. 한낮의 노란 볕에 빨래를 바짝 말리고, 챙 넓은 모자로 완전무장을 한 채 압화 액자를 만들 꽃을 채집하러 다녔다. 어제 내린 비 덕분에 하늘이 어찌나 맑던지 다른 도시의 산등성이까지 보였다. 수묵화처럼 뭉근히 쌓인 능선을 보 왠지 모르게 안전한 곳에 폭 쌓여있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시골의 하루도 나름 바쁘다. 도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지라도 이곳의 하루에는 '오토(Auto)'가 없다. 손길을 주어야 할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이고 잠시간의 낮잠과 이웃과의 짧은 티타임을 하고 나면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된다. 요즘엔 하루의 풍경을 놓치는 것도 아쉬워 자주 마당에 나간다. 해가 아무리 뜨거워도 집 앞 화단의 꽃들을 구경하고 며칠 전 올라갔던 산 꼭대기의 정자를 바라보며 대기질을 가늠한다.


  밤이 되면 일기를 쓰듯 하루의 감상을 기록한다. 다행히 내게는 브런치라는 좋은 글 밭이 있다. 본격적인 농사를 짓지 않아도, 늦은 시간 조용한 거실에서 작은 랩탑 화면에 오늘 하루의 수확을 고스란히 토해내며 나와 마주 앉는다.

 




 저녁엔 서울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역까지 배웅해 드렸다.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지하철 역 근처는 꽤 번화하다. 오래간만에 반짝이는 간판들과 노점의 시끌벅적한 소음을 마주하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시의 삶이 생각났다. 나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내가 원체 시골 체질인건진 모르겠지만 그 삶이 그닥 그립지 않다는 것이 놀랍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에서 벗어난 지 채 5분도 안되어 시야가 어두워졌다. 여기서부터 마을까지는 질주가 가능한 구간이다. 신호 구간도 길고, 무엇보다 차가 없다. 시골의 9시는 사실상 한밤 중이기 때문에 뻥 뚫린 도로 위에 나 혼자만 달리고 있었다. 시원한 밤공기를 타고 도로 위에서도 풀 냄새가 났다. 군청색으로 내려앉은 하늘은 근사했고, 문득 음악이 듣고 싶었다.


 전에는 운전하면서 습관적으로 늘 음악을 들었는데, 몇 달 전 너무 충격을 받았던 날 (그의 부정행위 증거를 확인했던 다음 날이기도 하다) 운전하다가 펑펑 우는 바람에 사고가 날 뻔해서 이날 이후로 한동안 플레이리스트를 봉인했다.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가끔 클래식을 틀긴 했다. 졸음이 몰려오는 바람에 이 곡들은 금방 삭제했지만 말이다.


 별다른 업데이트 없이 늘 반복되던, 박제된 나의 빌보드 차트. 백번도 넘게 들은, 멈춰있던 나의 시간동안 잠자던 플레이리스트가 오랜만에 재생된다. 한동안 새소리만 듣고 살다가, 뭔가 기계음을 들으니 조금 낯설다. 몇몇 곡을 지나 Alan Walker의 <All falls down (Feat. Juliander, Noah Cyrus, Digital Farm Animals)> 이 나왔다. 몇 달 전 온갖 궁상을 떨었던, 눈물의 드라이브의 마지막 곡.

 이 노래가 재생될 즈음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바람에 시내 한복판에서 급정거를 했었다. 구슬픈 발라드도 아닌, EDM 베이스 곡 한 소절 한 소절에 힘을 싣던 그날의 나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짠하다.


 오늘의 나는 리듬까지 타가며 가사를 따라 읊는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같은 노래를 반복했다. 너무나 익숙한 노래인데도 오늘은 왠지 리믹스 버전을 듣는 듯 새롭게 들리는 것을 보면, 나도 그 시간 동안 달라졌나 보다.


'Cause when it all falls down
 then whatever
(모든 게 무너져 내려도 어떻게든 되겠지)

When it don't work out
for the better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면)

If we just ain't right
and it's time to say goodbye
(이게 옳은 길이 아니라면 이별을 말할 때가 된 것 같아)

When it all falls down
when it all falls down
(모든 게 무너질 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I'll be fine
(난 괜찮을 거야)

      



 창문을 내리자 바람에 소리가 흩어졌다. 문득 언젠가 카파도키아에서 무작정 차를 빌려 쏘다니던 여행의 기억이 떠올랐다. 목적지도 없이 그 광활한 자연 한복판을 달리며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던 혼자만의 여행.

 

 목적지도, 내가 어디쯤 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진짜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블루투스 기능도 없는 낡은 차 안에서는 알아듣지 못할 튀르키예의 아나운서가 실컷 떠들며 웃었다. 내용도 모른 채 나도 따라 웃었다. 매끈한 조각 같은 절벽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광활한 벌판을 달리다 마침내 도시의 끝을 바라보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7년 전, 카파도키아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고작 이런 걸로 오래도록 울고 있을거냐며 엉덩이를 냅다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무모하고 용감했던 내가 나는 또다시 괜찮을 것이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자연에 깊이 감동하며 빠져들고, 지나며 마주치는 모든 풍경들에 경외심을 갖던, 그토록 자유롭던 내가 다시 내 앞에 선다.


  짧은 드라이브에서 그토록 스스로에게 충실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아마도 이곳에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가는 중인 것 같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좌절하던 그때, 다시 생의 의미를 부여한 이 소박한 곳에서 나는 비로소 다시 살아나는 중인 것이다.  



But I'll be fine
I'll be fine
(하지만 난 괜찮아, 난 괜찮아질 거야)

and that's that  
(그리고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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