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초등학교 몇 학년 땐 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제인 에어를 밤늦도록 읽었던 날이 있었다. 저녁에 읽었던 책의 뒷내용이 궁금해서 잠 못 이루던 날, 결국 나는 스탠드를 켜서 다시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제인의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 로우드 기숙학교에서 발 묶여 지내던 날들로 마음 아파하다가, 제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을 알아갈 땐 나도 함께 즐거웠다. 하지만 로체스터가 숨겨둔 미치광이 부인의 해괴한 행동으로 놀란 나는 쪼그라든 마음으로 어두운 밤이 무서워 이불 속에 들어가 읽기도 했었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이야기로 물든 깜깜하고도 고요한 밤, 나는 그렇게 늦은 밤까지 책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릴 때 읽은 제인 에어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제인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던 이야기 속에 내가 깨닫지 못한 제인의 여러 매력이 있었다.
먼저 이 책은 제인이 직접 이야기하며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른이 된 제인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기억을 하나씩 꺼내고 있는데,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나는 불협화음이었다.” (19쪽)라고 말하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외숙모와 사촌들, 하인들까지 모두 인정하고 있다. 가난한 목사와 결혼한 여동생,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부부가 죽어 조카를 데리고 와 정성스럽게 키우다가 죽은 외삼촌 리드, 그리고 그가 못마땅한 리드 부인. 자신의 처지에서 한 발짝 물러 거리를 두어보고 있어 그녀의 말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또 그녀가 머물던 곳에서는 그녀의 치열한 고민과 사색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을 한다. 나는 그녀의 사색의 길을 따라 함께 걸으며 점점 더 몰입하게 되었다.
제인은 호기심이 많고 자유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게이츠헤드에서 살다가 로우드 기숙학교로 보내진 제인,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학교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6년간 생활하며 절제된 생활이 몸에 베였음에도 학교 밖, 넓은 세상으로 가보고 싶었던 제인은 로우드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제 나는 진짜 세상은 넓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희망과 공포에 찬, 감정과 흥분으로 들끓는 다채로운 삶의 현장이 그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위험 속에서 진정한 삶의 지식을 찾아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121쪽)
그녀는 손필드에서 가정교사가 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평온한 날을 보내던 중에 그곳의 주인인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며 여태 느끼지 못한 행복을 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로체스터는 제인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그동안 그를 지나간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이 있는 만큼 쌓인 경험치가 많았다. 제인에게 매료된 로체스터는 그녀를 지배하려는 욕구가 강하지만 제인은 그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고 세상 경험이 많다고 해서 제게 명령할 권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 우월한지는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달려 있죠" (193쪽)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 또는 육체를 통해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내 영혼이 당신 영혼에 말하는 거예요. 마치 우리 두 사람이 무덤을 지나 하느님 발치에 서서 평등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367쪽)”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흔들리고 그 남자에게 동화될 법도 한데 제인은 자신의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한다. 스스로를 챙기는 모습에서 ‘멋지다’는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나중 손필드를 떠나 무어하우스를 지내던 중, 사촌오빠인 세인트 존이 종교적인 이유를 앞세워 아내가 되어 선교활동을 함께 하자고 막무가내로 주장을 해도 제인에게는 결혼에는 사랑이 우선이기에 거절하기도 한다.
“그러면 저는 저 자신을 다 바치는 게 아니고 선교사 일만 할 거예요.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니까요. 저 자신을 다 바쳐야 알맹이에 껍데기를 더하는 일일 뿐일 거예요. 당신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지만 저 자신은 제가 갖고 있겠어요.” (595쪽)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키며 그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을 지키려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녀도 사람이다. 아무리 야무지고 자기애가 있는 제인일지라도 그녀 역시 사랑을 갈구하며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로체스터는 사랑하는 제인에게 청혼을 하며 둘은 계속 함께할 줄 알았는데, 결혼의 문턱 앞에 선 채로 이뤄지지 않았다. 로체스터가 집에 숨겨둔 미치광이 부인의 존재가 드러나고 제인은 여태 알지 못한 그의 어두운 과거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로체스터를 향한 믿음이 깨지고 제인은 손필드를 떠났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새로운 곳에서의 길은 막막하고 힘들기만 하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 정착한 무어하우스, 그곳에서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자신의 핏줄인 사촌들과 함께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되어 더없이 소중한 행복을 맛보기도 한다. 또 사촌오빠인 세인트존이 세운 모턴 학교의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는 순간이 왔음에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재차 확인하기도 한다.
들판을 바라보며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왜 이럴까? 내 주인에게서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운명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해서였다. 내가 떠났기 때문에 절망적인 슬픔과 치명적인 분노에 찬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만큼 정도에 한참 벗어나 있을 것 같아서였다. (527쪽)
로체스터가 있는 손필드로 돌아가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무의식 중에 느끼는 제인의 모습을 보며 아무리 자신의 내적 원칙이 중요해도 사람의 사랑하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오기도 했다. 자신이 떠난 로체스터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안부가 궁금하고 그를 향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인간미 팍팍 풍기는 제인을 감싸주고 싶기도 하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기도 했다.
아이 엄마가 되어 꼼꼼하게 다시 읽은 제인 에어, 이 책은 결코 로맨스 소설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제인의 사랑스러운 여러 매력이 곳곳에 있었다. 제인이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 걸으며 그녀의 일상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사색하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그녀를 응원하기도 하고 나 역시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자신의 상황을 해결해가는 제인이 멋져 보였다. 시대는 다르지만 멋있는 언니를 한 명 알게 된 것 같았다. 고아, 가정교사와 같은 자유롭지 못한 처지일지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단단한 제인, 사랑 외에도 호기심 많은 그녀, 자유의지를 품은 그녀, 시대는 다르지만 멋있는 언니를 알게 된 것 같아 든든하고 기쁘다.
하마터면 제인 에어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알고 있을 뻔했다.
로맨스 소설로 끝나면 절대로 안 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