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새됐던 이야기 - 被髮左衽

제14 헌문편(第十四 憲問篇)-17

by 누두교주

‘의미는 상호 의존적인 차이에서 발생한다’① 예쁜 것이 있으려면 못난 것이 있어야 하고 큰 것이 있으려면 작은 것이 있어야 한다. 같은 이치로 문명을 이야기하려면 야만이 있어야 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중화(中華)라는 단어를 들으면 바로 자장면을 떠 올리며 쉽게 비하해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수천 년 동안 ‘문명의 중심’이란 의미로 천하에 군림하던 의미였다.


『논어』를 읽다 보면 ‘중화’라는 우월적이고 패권적인 의미의 근본을 만날 수 있다.

자공이 여쭈었다: ”관중은 인자가 아닐 것 이외다. 환공이 자기의 주군 규를 죽였는데도, 같이 죽기는커녕, 환공 밑에서 재상 노릇을 하다니요. “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覇者)가 되게 하여, 천하를 크게 한 번 바로잡으니, 중원의 백성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은혜를 입고 있다.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상투 없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덮어 매는 좌임(左衽)을 하고 있을 것이다.②

옷을 여미는 방향과 머리 모양에 따라 문명과 야만이 구분된다는 발상이 무척이나 가소롭다. 더 웃기는 건 이런 걸 받들어 외우고 이런 걸 모른다고 사람을 무시하면서 폼 잡고 산 군자들의 세월이다. 결국, 중국의 군자들은 만주족의 지배를 받아 머리 돌려 깎기를 당했고 조선의 군자들은 야만의 말발 굽 아래 대가리를 처박아야 했다.


그림설명: 명나라 때 군자라고 머리 기르고 관까지 쓰고 폼 잡다 청나라 때 전국적으로 홀랑 깎인다. 조선말 단발령은 여기에 비하면 그냥 농담이다.




1840년 발발한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그 부실한 밑천이 드러난 중국은 1949년 공산당 혁명으로 나라 문을 걸어 잠그고 짱 박힐 때까지 전 세계로부터 엄청나게 삥 뜯겼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대강은 안다.③


그러나 그 이전,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한족이 수립한 국가들은 천하의 중심으로 막강한 국력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런지 브런치 글 200회 기념으로 소략하나마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결론은 대륙적 기질이 갖는 무지막지함은 새되는 상황도 매우 스펙터클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공.④


우리는 흔히 ‘사대주의’라고 하는데, 사대(事大)는 ‘큰 것을 섬긴다.’는 뜻이다. 덩치가 크면 힘이 세니 잘 모셔야 한다는 유치한 판단이 정책화된 것이 ‘사대주의’이다.

이러한 사대주의의 실천적 방법이 ‘조공’이다. 그래서 작은 우리나라는 인삼과 같은 특산품은 물론 여자들까지 중국에 바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가 중국에 바친 것은 새 발의 피다.

조공을 바치는 이유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중국을 대상으로 한 우리나라 외교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1) 조공을 바치는 작은 나라 통치자가 큰 나라의 승인을 받아 자기 위신을 높이는 목적.

(2) 그래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 내부의 권력투쟁에 유리하고,

(3) 큰 나라와 같은 편이 돼서 국경 방어비용을 절약하는 이점.

조공을 받는 이유는 갑자기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를 값싼 비용으로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작은 나라의 특정한 지도자를 밀어주거나 필요하면 이 간계를 쓰기도 했던 것이 중국의 역사였다.④


그렇다면 천하의 중심인 중국은 조공을 받기만 했을까? 천만에! 조공을 아주 대륙적으로 바쳤다. 삥도 뜯겨본 놈이 뜯는 것과 다르지 않다.




2. 한(漢) 나라.


단군 할아버지가 세운 고조선을 침략한 것이 한(漢) 나라다. 중국 민족을 한족이라고 하고 글자를 한문이라고 하듯 한나라는 중국 한족 역사의 자랑이다. 과연 그럴까?


한나라를 개업한 고조 이름은 유방인데, 그가 세운 한나라는 흉노(匈奴)에 조공을 바치던 조공 국이었다.

한 고조 유방은 기원전 200년 평성(平城)에서 극적으로 깨지고(이를 중국 역사에서는 ‘평성의 치욕(平城之耻)’이라고 한다) 매년 옷감, 음식, 여자(공주)를 바치기로 하고 흉노의 침략을 면했다.

당시 중화(中华 - 문명국)는 한나라가 아니라 흉노였다. 중국의 4대 미녀로 보통 양귀비, 초선, 서시 그리고 왕소군을 꼽는데 이중 왕소군은 흉노에 바쳐진 공주이다. 중국 4대 미녀 중 25%는 선물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라 아니할 수 없다. (양귀비는 맞아 죽었고 초선은 서방(여포) 잡아먹고 과부가 됐으며 서시는 야반도주했다)


그림설명: 왕소군이 중국을 떠나 낙타를 타고 흉노로 시집가는 모습. 아무도 배웅을 안 한다.


한나라 뒤의 당, 요, 금, 원, 청나라는 모두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패스!⑤




3. 송(宋) 나라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에 제후국을 자처했다. 즉 금나라가 통치국이고 송나라는 신하국이라고 자칭한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북방 오랑캐의 무식하고 용감한 무력에 대한, 높은 문화적 향기를 가진 송나라의 문약함이 패인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진실은 '잔 대가리 굴리다가 되빠꾸 맞은 것'이다.


휘종이라는 송나라 임금이 그냥 가만히 약속이나 잘 지키고 짜져 있거나 아니면 조용히 힘을 키우거나 할 일이지 되지 못하게 잔머리를 굴린다. 금나라와 협공해 요(辽) 나라를 공격해 뭘 좀 챙겨 보려다 걸려서 새됐다. 그래서 황제에서 짤렸다.


다음 임금이 흠종이었는데 이 친구 역시 약속을 떡 사 먹었다. 즉 금나라에 재물을 제공하고 땅을 바치고 큰아버지로 모시기로 약속해 놓고 쌩 깐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나라가 고구려에 했던 것처럼 내부 교란을 획책하다 걸렸다.


결과는 휘종, 흠종을 포함해 왕실 3,000명이 포로로 금나라에 끌려갔다. 이 사건을 ‘정강의 변(靖康之变)’이라고 한다.

그림설명: 대를 이어 잔머리 굴리다 일타쌍피로 금나라로 끌려가는 휘종과 흠종.


송나라 정부는 잡혀간 , 현직 황제를 구출하는 작전을 세우는 대신에, 현직 황제의 동생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다. 그것도 양자강 건너 항주로 내빼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그것이 남송(南宋, 남쪽의 송나라)이 되는 것이다.


당시 남송 지식인들은 지금 중국의 한족 정체성을 만들었다는 설(썰)이 있지만 역시 뻥이다. 어쩌면 지식인(기득권을 가진 계층)들은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일반 민중(한족)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한족 송나라 보다 금나라를 더 좋아했다.


일례로 송나라 재상 한 탁주가 16만 대군을 이끌고 금나라로 쳐들어가 13만 금나라 군대와 붙은 적이 있다. 이때 한 탁주는 금나라 지역에 사는 한족 백성들이 송나라를 위해 궐기할 줄 알았다. 결과는? 거꾸로 송나라 군인 7만여 명이 금나라 쪽으로 도망갔다.


그나마 남송도 1279년에 망했다. 누구한테? 몽고한테! 이제 한족이 지배하는 땅은 지구 상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황제가 외적에 잡혀, 황제의 해골이 적의 술잔으로 만들어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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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明) 나라.


우리는 명나라가 몽고족을 내몰고 대륙의 주인이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사실은 몽고를 완전히 내쫓지는 못하고 대륙의 일부만 차지한 것이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주걱턱에 얼굴이 얽은 추남으로 일개 반란군 졸개였다가 대권을 잡았다. 얼굴과 풍기는 이미지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매우 흡사하다.


요게 주원장이다.


요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둘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니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하다. 같은 듯 다르지만 못생겼다는 점은 부인 못할 공통점이다.


그의 특징은 편 가르기이다. 즉 중원과 이적으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의 자원 절반은 활용할 수 없다. 따라서 명나라의 판도는 매우 쪼그라들었다.


명나라 판도: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의 1/2도 안된다. 지금 중국 영토는 청나라 영토에서 러시아에 일부 삥 뜯기고 남은 것이다.


명나라도 역대 중국 왕조와 같이 당연히 황제가 잡혀갔다. '토목의 변(土木之变)'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허베이 성에서 몽고군에 크게 패해 황제 (정통제, 영종)이 납치되어 갔다.



재미있는 것은 다음부터이다. 황제가 생포돼 납치되고 난 후에 황제를 다시 찾아올 생각은 당연히 안 하고 이복동생을 새로 황제(경태제)로 옹립했다.


그러니 몽고군 입장에서는 잡아간 황제가 쓸모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에 그냥 다시 돌려줬다. 정통제는 돌아왔지만 이미 새로운 황제가 있으므로 허울 좋은 태상황이 되어 유폐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후 명나라는 극도의 폐쇄적인 대외 정책을 폈고 남쪽의 남경으로 천도를 검토하다가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보수, 완성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그냥 북경에 눌러앉았다. 남쪽으로 가자니 잘못했다가 송나라처럼 황제가 따블로 잡혀가는 전례(일타쌍피)를 따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일본의 한 학자는 관중이 문명 된 중화를 지켰다는 시각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왕자(王者)와 상대되는 말인 패자(霸者)로 관중의 가치를 부여한다.


“관중 이전에는 패자(霸者)가 없었다. 패자가 관중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어찌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의 이러한 시각은 명, 청대를 거치며 몰락을 길을 걸어간 대륙이나 그 길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따라간 조선과 달리, 일본은 다른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됐다.


①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②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3』 통나무. 서울. 2019. pp.398-399. 원문은 아래와 같다.

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覇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③ 북경, 청도, 상해, 광주 등 쓸만한 항구는 전부 점령당했었다. 만주는 아예 홀랑 뺏겨 만주국이 개업했으며 대만도 물론 빼앗겼었다. 남경, 항주 등 쓸만한 내륙 도시들은 물론 점령당했었다. 현 중국 공산당 대장 습근평의 모교인 청화대는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돌려줘 설립한 학교이다.(이렇게 주는 돈을 전문 용어로 '개평'이라고 한다)


현재 세계 경제 대국 Top 10중에 당시 중국을 약탈하지 않았던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④ 김영민 『중국정치사상사』(주)사회평론아카데미. 서울. 2021. pp.460-461


⑤ 당나라도 한족의 나라가 아니었다. 당나라 창업자 자체가 서북쪽 출신으로 전체 인구의 19%가 72종의 서로 다른 외국인들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 ibid. pp.307-308.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안시성에서 얼쩡거리다 양만춘에게 한쪽 눈을 잃어버린 이세민은 ‘당나라 황제 태종’으로만 알고 있으나 동시에 텡그리 카간(天可汗)의 직위도 겸했다. 이는 유목민의 대장(선우(单于)라고 부르던)이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사람들은 당나라를 타우가스, 탐가지, 혹은 타브가치 라고 불러 선비족의 한 갈래인 탁발(拓跋)이라고 불렀다. ibid. p.313


⑥ 오규소라이 『논어징 3』이기동, 임옥균, 임태홍, 함현찬 옮김. 소명출판. 서울. 2010. pp.122-123. 원문은 아래와 같다.

管仲之前無覇, 霸者管仲始, 豈非豪傑之士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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